1990년 노태우 대통령 일본 방문 앞두고
여성단체와 여성학자들 성명 발표하고
이화여대 여성학과 학생들 입장 밝혀
“일본의 사죄와 배상 촉구한다”
같은 해 학자·37개 단체 정대협 결성

2020년 5월 13일 서울 종로구 평화의 소녀상의 모습. 이날 제1439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가 열렸다. ⓒ홍수형 기자
2020년 5월 13일 서울 종로구 평화의 소녀상의 모습. 이날 정의기억연대가 개최한 제1439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가 열렸다. ⓒ홍수형 기자

 

최근 논란의 중심에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정의기억연대 전신)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공론화하고 전시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을 국내외에 알린 단체다. 정대협은 1990년 11월 16일 여성단체 37곳과 학자들이 뜻을 모아 결성했다. 정대협은 1980년대부터 이어진 학자들과 단체들의 연구와 공론화를 발판으로 세워졌다.

앞서 1975년 일본 오키나와에서 배봉기님이 위안부 피해자임을 처음으로 증언했다. 당시 위안부 문제는 ‘정신대’라는 명칭으로 알려지기 시작했으나 한국 사회는 이를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국내에서 위안부 문제가 수면 밖으로 나오는데 큰 역할을 한 사람은 홀로 위안부 피해자를 찾아다니며 연구하던 윤정옥 교수(당시 이화여대 영문학과, 정대협 초대 공동대표)였다. 이효재 당시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 소개로 교회여성연합(교회연)과 연을 맺은 윤 교수는 교회연 도움을 받아 일본 오키나와, 큐슈, 홋카이도, 도쿄, 사이타마 현까지 ‘정신대 발자취를 찾아서’라는 조사활동을 진행했다. 답사 결과는 1988년 4월 제주도에서 열린 ‘여성과 관광문화’(일명 기생관광) 국제 세미나에서 발표된다. 윤 교수가 10여개국 활동가들 앞에서 위안부 문제를 공식적으로 폭로하면서 위안부 문제는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해방 후 40년 넘게 은폐돼온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마침내 공론화된 것이다.

1990년 5월 노태우 대통령의 일본 방문에 맞춰 여성단체와 여성학자들이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는 성명을 냈다. 여성신문은 1990년 5월25일자(제75호)에서 당시 ‘여성계 성명’ 발표 소식과 이화여대 여상학과 학생들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입장을 담은 ‘특별기고문’을 게재했다. 당시 입수된 위안부 피해자 관련 사진들도 함께 신문에 실었다. ©여성신문
1990년 5월 노태우 대통령의 일본 방문에 맞춰 여성단체와 여성학자들이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는 성명을 냈다. 여성신문은 1990년 5월25일자(제75호)에서 당시 ‘여성계 성명’ 발표 소식과 이화여대 대학원 여성학과 학생들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입장을 담은 ‘특별기고문’을 게재했다. 당시 입수된 위안부 피해자 관련 사진들도 함께 신문에 실었다. ©여성신문

 

그리고 1990년 봄, 노태우 대통령의 일본 방문에 맞춰 한국교회여성연합회(교회연),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단체와 여성학자들이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는 성명을 냈다. 여성신문은 1990년 5월25일자(제75호) <감춰진 역사 20만 종군 위안부 진상규명·보상책 마련돼야> 제하 지면을 통해 당시 ‘여성계 성명’ 발표 소식과 이화여대 대학원 여성학과 학생들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입장을 담은 ‘입장문’을 특별기고문으로 게재했다. 당시 입수된 위안부 피해자 관련 사진들도 함께 신문에 실었다.

여성단체들은 ‘노대통령 방일 및 정신대 문제에 관한 여성계 입장’이라는 성명을 통해 “세계 역사상 그 유례가 없었던 한민족의 수난과 여성의 성적유린이 가장 첨예화돼 나타났던 정신대(위안부) 문제를 더 이상 묻어둘 수는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금껏 여성계서조차 제대로 여론화하지 못했고 역사적으로도 진상을 규명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못했다”고 반성하며 “이는 한일 양국의 무책임과 철저한 가부장적 사회가 빚어낸 역사 회피”라고 규정했다.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여성학과 학생들도 “정부가 ‘민족사 복원’의 차원에서 정신대(위안부) 문제 해결에 주목해야 한다”며 입장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정신대(위안부) 문제의 해결이란 일본정부의 공식적 인정과 사과, 생존자에 대한 물적 보상과 위령비 건립 등을 통한 인권복원 등을 포함한다”며 “현 정권 또한 정치적 협상물로써가 아니라 민족사의 복원이라는 차원에서 정신대 문제의 해결에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같은 해 학자들과 단체 37곳은 일본 정부의 망언에 맞서 1990년 11월 16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정의기억연대 전신)를 발족했다.

다음은 1990년 5월25일자(제75호) 여성신문에 실린 이화여대 대학원 여성학과 입장문 전문.

여성신문 1990년 5월25일자 제75호. ©여성신문
여성신문 1990년 5월25일자 제75호. ©여성신문
광복 73주년인 15일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 평화로에서 제6차 세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 맞이 세계연대집회 및 제1348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수요시위가 열려 참가자들이 할머니 300분 사진과 함께 평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광복 73주년인 2018년 8월 15일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 평화로에서 제6차 세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 맞이 세계연대집회 및 제1348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수요시위가 열려 참가자들이 할머니 300분 사진과 함께 평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여성신문 

 

<이화여대 대학원 여성학과 성명서> 
현 정권은 ‘민족사 복원’의 차원에서 정신대 문제 해결에 주목해야 한다
 

은폐되어버린 정신대 역사

정신대는 일제의 식민지 침략에 대한 완전한 인정과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데서 기인하는 재일 동포의 법적지위 문제, 징용, 원폭피해자 문제 등과 맥락을 같이하는, 우리 민족 고난의 역사 중 일부임에 분명하다. 재일동포의 법적지위, 징용, 원폭피해자 문제 등은 어느 정도 여론화과정을 거치면서 해결의 당위성에 대다수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냈다. 그러나 정신대의 역사만은 유독 그 역사적 배경, 진상, 피해자 등이 알려지지 않은 채 묻혀져 왔다.

정신대 문제가 이처럼 등한시 되어 온 이유는 우선 일본이 과거의 제국주의적 만행을 은폐 하고 전란의 죄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관련 자료를 철저히 폐기시킨 데 있다. 그 다음 이유로는 역대 정권의 반민족성, 반민중성이 식민지적 잔재 청산을 유보하고 식민지시대 민중의 고통을 묵과함으로써 자신들의 정권유지만을 도모하는데 기인한다. 세 번째로 정신대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여성에 대한 성적 유린’이 가장 잔혹하게 자행된 사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와 같은 남성중심 사회에서는 그 피해자인 여성들이 그들의 과거를 떳떳하게 밝히거나 여론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이유로 들 수 있다. 네 번째로는 민족사의 수난과 여성의 수난, 그리고 그것의 현재적 의미를 규명하고 해결하려는 학계와 여성계의 무관심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정신대의 역사적 배경, 진상을 밝히고 그 해결을 촉구하는 작업을 통해 우리는 우리 민족의 수난의 역사를 올바로 규명, 민족의 지존을 되찾고 피해자들의 산산이 부서진 삶과 인권을 복원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정신대의 문제는 과거의 치욕적 역사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외화획득이라는 미명하에 기생관광, 미군을 상대로 한 매춘을 통해 제국주의의 성 침탈에 고통당하는 여성들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이제 더 이상 묻어 놓을 수는 없다. 정신대 문제의 철저한 규명과 가능한 해결을 통해 제국주의적 성 침탈의 현재적 의미까지도 밝혀야 한다.

일본군 사기진작 위한 희생물 

그러면 불확실하게나마 지금까지 알려진 정신대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937년 〈대동아 공영권〉을 꿈꾸던 일본은 급기야 중국침략을 감행하였고 중일전쟁이 시작 되자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수탈 정책은 일본 본토에서 전쟁터로 옮겨지게 된다. 이에 따라 조선 남자들은 병력보충을 위해 징용되어 전쟁터나 군수공장, 탄광 등지로 보내졌고 처녀들은 간호원, 세탁요원 등의 특수임무를 충당한다는 명목 하에 (그야말로 그것은 명목이었고 실은 일본군 상대 위안부를 징발한 것이었다) 대규모로 징발하기 시작했다.

물론 조선 처녀들을 일본 본토로 끌고 가 군수공장이나 매춘굴에 팔아넘기는 행위는 1910년대부터 공공연하게 자행되어 왔던 일이다. 그러나 정책적으로 조선 여성들이 대규모 징발을 당한 것은 1938년 초로 추정된다. 당시 관동군의 만주 주둔이 장기화되고 중국본토에 많은 일본군이 투입됨에 따라 장기적이고 대규모의 전쟁수행을 위해서는 군인들에 대한 통제와 사기진작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일본본토의 여성들을 강제로 끌어낼 수는 없었기에 ‘꿩 대신 닭’ 격으로 조선여성들의 징발이 시작된다. 위안부 징발을 위해 일본군 수뇌와 조선 총독부, 일본 매춘업자들 사이에 비밀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정신대 징발은 본격화되었다.

그 후 1942년 일본의 진주만 습격 이후 태평양전쟁이 확대되자 다시 많은 여성들이 속아서, 혹은 강제로 중국, 타이 버마, 인도네시아 등 태평양의 여러 섬으로 보내졌다. 이렇게 종군위안부로 동원된 17~20세 사이의 여성의 숫자는 자세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대략 17만~20만쯤으로 추정된다. 일본 마이니치 신문(1990.2월 2일자) 스즈키 유코의 글에 따르면 그중 조선여성이 80~90%였다고 한다.

동원된 여성들 중 일본여성들의 경우 주로 이전부터 매춘에 종사하던 여성들이 많았지만, 조선인들은 학교, 공장, 농촌 할 것 없이 전국 각지에서 무자비하게 끌려 온 10대 중·후반 여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스즈키 유코는 “이렇게 끌려 온 여성들은 조선인인 동시에 여성으로서, 조선을 식민지화한 세력에 의해 2중으로 착취되었다”고 쓰고 있다.

일본정부의 조직적 전쟁범죄

그 후 1944년 8월 23일자로 일본 후생성령에 의해 〈여자정신근로령〉이 공포됨으로써 정신대징발은 명실상부하게 합법적인 ‘정책’으로서 수행되었다. 이 령에 의해 여자들은 국민동원계획에 의한 상비요원으로 파악되어 남자들과 다름 없이 강압적으로 징용 당하게 된다. 그리고 이 법의 위반 시에는 국기총동원법 6조에 의해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천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게 되어 있었다.

정신대 징발이 이처럼 일본제국주의 정부에 의해 법적으로 제도화되어 공공연히 수행되었다는 사실은 이것이 단순히 일본인이 저지른 ‘만행’ 차원을 넘어서 군국주의 국가에 의해 조직적으로 자행된 전쟁범죄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신대는 한민족의 역사를 유린한 ‘가장 잔인한 형태의 범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패망 후엔 사살·생매장

이렇게 동원된 이들은 낮에는 탄약운반원이나 취사요원, 세탁부, 간호부로서 폭격의 위험에 떨며 혹사당했고, 밤에는 일본군을 상대로 ‘위안’행위를 강요받았다.

이화여대 윤정옥 교수의 정신대 취재기(한겨레 신문 1월 12일자)에 의하면 ‘위안부 수요는 〈니쿠이치〉라 하여 일본군 29명에 한국 여성 1명으로 계산해냈으나 일본 패전 직전에는 위안부 한 명이 일본군을 1백 명까지 상대했다‘고 한다. 또한 일본 정신대 출신으로 한국 정신대의 실상을 증언했던 시로타 스즈코에 의하면 “한국 여자들은 치마저고리를 입은 채 일본군 보초의 엄한 감시 속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일본군 병사들을 상대해야 했으며 때로는 최전방부대를 순회하며 쉴 새 없이 몸을 제공했다”고 한다.

당시 조선인 위안부들에게는 이름 대신 고유번호가 매겨졌고, 상대할 여자의 번호표를 들고 위안소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던 병사들은 자기 차례가 오면 그야말로 반광란적 학대를 했다고 한다. 이에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속출하였으며,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감독에게 매를 맞고 머리채를 잡아 채이거나 옷이 반쯤 벗겨진 상태로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일본이 전쟁에 패망하고 미군이 상륙하자 일본군들은 자신들의 죄악상을 은폐하기 위해 위안부들을 귀국시켜 주겠다고 속여 트럭에 태운 뒤 사살했는가 하면 반공호 속에 몰아넣고 생매장하거나 정글 속에 그대로 버려둔 채 도망해 버리기도 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일본이 패망하여 강제로 끌려왔던 조선인들이 조국땅을 찾아 너도나도 떠날 때, 이들 정신대들은 조국으로 돌아갈 꿈조차 꾸지 못하였다. 갈갈이 찢긴 몸과 마음, 수치심 때문에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엄두도 내지 못했거니와 전쟁 후 그대로 버려진 이들에게 여비가 있을 리 만무했기 때문이었다.  

정신대는 민족사의 상징

이렇게 남겨져 일본과 태평양 각지의 섬에서 전전하던 위안부들은 일본군과 함께 미군의 포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결국 다시 미군 상대의 위안부로 넘어 가게 된다. 일본군 상대의 위안부가 고스란히 미군 상대의 위안부로 넘어가는 정신대의 역사는 제국주의에 유린당한 비참한 한국 현대사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식민지 백성으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민족의 수난을 몸으로 감당했던 이 여성들은 그 후에도 인간으로서의 정상적 삶을 빼앗긴 채 뿌리뽑힌 삶을 살다가 고향땅을 그리며 한 많은 일생을 마감했거나, 과거의 악몽을 간직한 채 신분을 숨기고 이국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 이 지옥같은 과거를 되살려내고 그것을 밝힘으로써 또다시 치러야 할 정신적 고통을 감당하기에 는 그들의 과거가 너무나 처참한 것이기 때문이리라.

이처럼 비참한 정신대의 역사는 이제 일본의 제국주의적 죄과가 한·일간 정치적 협상 테이블에서 점차 망각됨에 따라 더욱더 규명 가능성이 적어져 가고 있다.

그러나 정신대는 일본 제국주의 국가가 정책적 차원에서 법령까지 제정하면서 자행한 전쟁범죄의 하나이기에 그 해결 또한 제국주의 전쟁의 주체에 의해 공식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정신대 문제의 해결이란 정신대와 관련된 모든 만행에 대한 일본정부의 공식적 인정과 사과, 생존자에 대한 물적 보상과 위령비 건립 등을 통한 인권복원 등을 포함한다. 현 정권 또한 정치적 협상물로써가 아니라 민족사의 복원이라는 차원에서 정신대 문제의 해결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