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신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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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을 나서는 녀학생의 희망’ 기사 중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생 사진. <자료·조선일보. 1925. 2. 28>▶

“공부를 더하고 십흐니

갈곳이 잇슴니가,

공부를 그만두려면

무슨 일거리가 잇슴니가”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는 금년에 삼십팔명의 개척자가 교문을 나서게 되엿다합니. ……졸업후 즉시 가뎡으로 드러갈 사람은 한명 그 외에는 ‘혼인은 차차하지’ 그리고 누가 너는 엇더한 남편을 구하느냐 물으면 ‘누가아나 보아가다가 에 맛는 사람이 잇스면’ 그러케 활발하고 카담한 소리를 하며 나온다합니다. (〈조선일보〉, 1925. 2. 28)”

이 글은 조선일보 1925년 2월 20일부터 〈가뎡부인〉란에 연재된 ‘학창을 나서는 녀학생의 희망’이라는 기사 가운데 하나이다. 당시 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의 대부분은 진학을 해 더 많은 배움의 길을 간다는 포부에 가득 차 있었다. 가정으로 들어가겠다는 경우는 극히 소수에 불과했으며 오히려 독신주의를 선언하는 학생들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 여고보의 교육내용이 재봉이나 수예 등을 위주로 구성돼 있었고, ‘현명한 어머니’와 ‘어진 아내’의 양성을 교육목표로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여학생들은 보다 진보적인 희망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다.

인력거·삯바느질로 북경여대 유학시켜

과연 이들 여성은 자신의 포부를 실현시키며 살아갈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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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학교계통도 - 일본강점기 조선에는 조선인이 가는 학교, 일본인이 가는 학교, 그리고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공학하는 학교가 있었다. 조선인 가운데 보통학교를 졸업한 여학생은 여고보로 진학할 수 있었다.

<자료·<朝鮮の敎育> 1923>

19세기 말 여성의 사회적인 참여가 부분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개화 지식인들은 각종 잡지나 신문을 통해 여성계몽의 필요성을 외쳤고, 이를 위한 사립 여학교를 설립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1910년 이전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설치된 여학교는 양적으로는 미미한 것이었으나 여성들에게 제도교육의 기회를 제공했으며, 여성도 민족의 일원이 돼야 하며 될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 주었다. 1910년 이후 일제가 세운 공립보통학교에 대한 거부감과 조선인 사립학교에 대한 통제 등으로 주춤했던 조선인의 교육에 대한 욕구는 1919년 3·1 독립 운동을 거치면서 입학난이라는 사회현상을 만들어 낼 정도로 고조되고 있었다. 이는 여학생들의 진학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입학난! 이것은 조선사람이 금방 당하는 큰 설움이지만 그 중에도 여자의 입학난 이것은 정말 심하다. 보아라 조선에 조선사람을 가르키는 학교라고 원톄 몃곳이 못되는 것이나 여자를 가르키는 학교는 그 중에도 적지 아는가. (〈신여성〉, 1924. 4)”

1920년대 말까지 조선인 여학생이 다니는 여고보는 전국에 16개교(공립 6, 사립 10), 이들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의 총 수는 4199명이었다. 당시 보통학교를 졸업한 여학생의 수가 7930명이었던 것과 비교해 보면 졸업생의 많은 수가 상급학교로의 진학을 원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여고보에 다닐 수 있었는가?

당시 여고보에 다닐 수 있는 학생들은 부모가 관리나 군인, 경관, 교원, 법률가, 전당포, 인쇄업 등의 공무자유업이나 상업에 종사하는 비교적 부유한 가정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여성교육에 대한 관심이 반드시 가정형편의 좋고 나쁨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었던 듯싶다. 1925년 2월 19일자 〈조선일보〉에는 딸을 교육시키기 위해 정성을 다하는 가정의 모습이 소개됐다.

“‘돈에는 근심이요 자식에는 우숨이라’는 말이 업지 아니하다. 간동 한편 구성 엇던 납작한 초가집에서는 날마다 화평한 우숨소리와 정다운 속살거림이 菅ㅓ나지 아니하니……그들은 자손을 교육식히겟다는 일편단심으로 어닐 학순이를 숙명학교에 입학식히고 남의 집 행랑에 몸을 부처서 남편은 인력거를 며 안해는 바누질 품을 팔어 학순이 학비를 치두워준 것이다.”

이 기사의 주인공은 인력거와 삯바느질을 해 여고보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딸을 북경여자대학으로 유학시키고 있다. 여기에서 부모의 고단한 삶은 자녀를 위한 보람으로 승화되고 있는데 이처럼 상급학교로의 진학에 대한 열망은 신문이나 잡지 등을 통해서도 자극되고 있었다.

여고보 졸업해도 50~80% 가 취직 못해

1920~30년대 각종 신문이나 여성 잡지에서는 전문직 여성들의 성공담과 직업여성으로서 갖춰야 할 태도 등이 쉼 없이 게재되고 있었다.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여성들에게 주체적인 선택에 의한 삶을 보장해 주는 전제조건으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여고보를 졸업한 후 사회로 나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바람이었다.

그러나 어렵사리 들어간 여고보를 무사히 졸업한다 해도 그들에게 사회적 지위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1931년 각 여고보의 졸업생 진로 상황을 보면 학교에 따라 적게는 50%에서 많게는 80% 이상의 졸업생이 취직을 못하고 가정에 머문다고 기록돼 있다. 가정으로 들어간 이들 여성은 학교에서 배운 지식과 경험이 구식 가정의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전근대적 사고방식과 합치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과연 지금의 우리는 가정에 드러가되 배호지 안은 부인들의 안젓든 자리에도 못갈 것이고 사회에 나가되 용납할 곳이 업습니다 이러할 바에야 부모의 館ㅕ부서지도록 긁어논 돈을 미창 适ㅐ들어다가 삼사년 배혼 것이 도리혀 한나고 붓그러울 입니다. (〈신여성〉, 1931. 3)”

여고보 졸업생들은 가정으로 들어가는 것이 자신들의 어머니가 살아왔던 삶을 답습하는 것이라 느끼고 있었다. 그녀들이 3∼4년간 학교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와 같은 삶을 살지 않겠다는 각오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 목적은 ‘사회적 자아실현’을 통해 달성될 수 있었다. 따라서 그 기회를 상실한 여고보 졸업생들은 허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교문을 마즈막 나가려는 졸업생들 각자들의 마음은 도리혀 무서운 고민중에 지낸담니다. 첫째, 공부를 더하고 십흐니 갈곳이 잇슴니가……둘째, 공부를 그만두려면 무슨 일거리가 잇슴니가……셋째, “졸업이나 하기까지”, “졸업이나 한 후에”하고 밀어온 것이니 “인제 졸업하엿스니 어서 스ㅣ집에나 가거라”고 집에서 성화가 생기지 안슴니가 (〈신여성〉, 1924. 4)”

여고보를 졸업한 당시의 여성들은 자신을 받아줄 사회가 없다는 것, 그리고 가정에 들어가도 적응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 글은 숙명여대 아시아여성연구소가 한국학술진흥재단의 기초학문지원을 받아 연구하고 있는 〈한국여성 근·현대사〉내용을 새로 쓴 것이다.

이명실 / 숙명여대 아시아여성연구소 공동연구원, 숙명여대 의사소통능력개발센터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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