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일등의 조카에게 보내는 편지] 크고 작은 재난이 닥쳐도 슬기롭게
[나일등의 조카에게 보내는 편지] 크고 작은 재난이 닥쳐도 슬기롭게
  • 나일등 사회학자
  • 승인 2020.05.16 16:10
  • 수정 2020-05-16 16: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일등의 조카에게 보내는 편지]
“예루야, 학교에서는 공부 말고도
재난에 대처하는 법도 배우게 될 거야.
슬프게도 지구 환경은 더 나빠지고
재난은 더 자주 닥칠 것 같거든.”

예루야, 학교 안 가서 어떠냐고 물으니, 학교 가기는 싫지만 급식은 먹고 싶으니까 급식차가 집에 와서 밥 주고 갔으면 좋겠다고 그랬지. 코로나가 세상을 뒤흔드는 가운데에서도 넌 씩씩하게 잘 자라고 있는 것 같구나. 딱 1년 만 쉬고 학교 가면 좋을 것 같다고 그랬는데 정말로 그렇게 될 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 즈음에는 많은 것들이 변해 있을 거야. 학교에서는 공부 말고도 코로나 같은 재난에 대처하는 법도 배우게 될 거야. 슬프게도 지구 환경은 더 나빠지고 재난은 더 자주 닥칠 것 같거든.

삼촌이 일본에서 겪은 이야기를 해줄게. 예루가 태어난 해에 큰 지진이 있었어. 그때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 집이 흔들리는 느낌이 심상치 않아서 밖으로 뛰쳐나왔는데 벽과 창문이 요란스러웠고 숲 속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가 마치 샤워기를 세게 틀어 놓은 듯 했어. 땅이 으르렁대는 소리에 옴짝달싹할 수 없었고 전선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매서웠어. 그런 소리가 2분도 넘게 이어졌어.

그리고 큰 파도(쓰나미)가 바닷마을을 덮쳤어. 지진은 땅 속에 있는 거대한 돌판(지각판)이 갑자기 움직이면서 일어나는 것인데, 동일본대지진 때는 바닷속에 있는 돌판이 한국 땅 크기 만큼 움직였대. 그러면서 한국 만한 파도가 일어났고 바닷마을을 순식간에 파괴했어.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도 망가졌고 그러면서 방사능 물질이 누출되는 사고가 일어났어. 네가 태어나기 몇 달 전에 일어난 일이야. 

지난 2월, 동쪽 해안을 따라 여행을 다녀왔어. ‘산리쿠(三陸) 해안’이라는 곳인데 바다와 마을 풍경이 아주 아름다운 곳이야. 마침 날이 맑더라.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과 남색 바다가 마치 물감을 칠해 놓은 것 같았어. 검은 바위 절벽이 마을을 동그랗게 감싸고 있었는데 너무나 아름다워서 한참을 바라봤어.

그런데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아름다워 보이지 않아서 눈물이 나더구나. 해안선이 울퉁불퉁한 리아스식 해안에 파도가 밀려 오면 파도 높이가 몇 배로 높아지고 파괴력도 강해져. 그래서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곳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돼. 빈터만 남은 마을에 간간히 상점이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오가는 사람은 많지 않았어. 대신 검고 큰 주머니가 곳곳에 쌓여 있었지. 네 키만한 주머니에는 주변에서 긁어모은 흙이 들어 있는데, 흙에 방사능 물질이 묻어 있어서 모아 놓은 거야. 이런 주머니가 수천 만개가 있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미에마치(浪江町)와 후타바마치(双葉町)에도 들렀어. 후쿠시마 원전에서 가까운 마을인데 방사능 오염 탓에 사람이 살 수 없게 된 곳이야. 9년 전 모습으로 반쯤 쓰러진 건물 사이로 작은 들짐승의 눈이 번쩍일 때마다 오싹했어. 기분 탓인지 벌레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더구나. 가끔 순찰을 도는 차의 경광등이 조용히 지나칠 뿐이었어. 골목으로 이어지는 길은 모두 통행 금지 팻말이 가로막고 있었는데, 한참을 달리다 보니까 지금 내가 통행 금지 구역에 있는지 어떤지 헛갈리더라. 공간선량(공기 중 방사선량)을 알리는 전광판의 빨간 불빛을 보고 그제야 길을 잃은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어.

삼촌이 어렸을 때 원자력은 깨끗한 에너지라고 배웠어. 그리고 지금도 온실가스 배출량 같은 데이터를 보면 다른 발전 방식에 비해 환경에도 좋고 값도 싸 보여. 하지만 ‘데이터’는 가끔 사람들을 오만하게 만들기도 해. 데이터는 언제나 일이 벌어진 후에야 얻을 수 있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미래에 관한 결정을 내려야만 하거든. 미래 사회의 구조, 기술력, 자연 재해, 전쟁과 테러 같은 것은 ‘데이터 너머’에 있는 것으로 예측하기가 아주 어려워.

사람들은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에 매우 불안해 해. 그래서 자꾸 과학에 기대려고 하지. 하지만 그 꿈이 이루어지려면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단다. 그래서 미래에 관한 결정을 내릴 때 데이터만 보고 결정을 내리면 ‘데이터 너머’에 있는 것들을 무시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돼. 그리고 세상은 이전보다 더욱 위험하게 변할 것이고. 삼촌이 보고 온 마을은 그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 같아.

*필자 나일등 :  일본 도쿄대학 사회학 박사로 센슈대학 사회학과 겸임 강사로 강단에 서고 있다. <br>『사회 조사의 데이터 클리닝』(2019)을 펴냈으며, 역서로는 『워킹 푸어』(2009),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2012)가 있다.
*필자 나일등 : 
일본 도쿄대학 사회학 박사. 센슈대학 사회학과 겸임강사. 주말이면 한국에 사는 초등학생 조카와 화상 통화를 연결하고 온라인 게임을 즐긴다. 게임 중간중간 공부도 가르치고 있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사가 마음에 드셨나요?

여성신문은 1988년 창간 이후 여성 인권 신장과 성평등 실현을 위해 노력해 온 국내 최초, 세계 유일의 여성 이슈 주간 정론지 입니다.
여성신문은 여성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여성인 '안전, 사회적 지위, 현명한 소비, 건강한 가족'의 영역에서 희망 콘텐츠를 발굴, 전파하고 있습니다.
저희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좋은 기사 후원하기를 해주세요.
여러분의 후원은 여성신문이 앞으로도 이 땅의 여성을 위해 활동 할 수 있도록 합니다.

여성신문 좋은 기사 후원하기


※ 소중한 후원금은 더 좋은 기사를 만드는데 쓰겠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50 (3가 222번지) 골든브릿지빌딩 1층, 9층
  • 대표전화 : 02-318-9300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신준철
  • 제호 : (주)여성신문사
  • 사업자등록번호 : 214-81-03304
  • 대표이사 : 김효선
  • 발행·편집인 : 김효선
  • 여성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0 여성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admin@wome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