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볼테르 지음)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볼테르 지음)

 

2020년 들어서 힘겨운 방역에 몰입하다가보니 어느새 5월 중순이다. 그동안 긴장으로 인한 피곤함, ‘거리두기’로 수축된 경제활동, 예측할 수 없는 앞날에 대한 불안 등으로 침울해지곤 한다. 하지만 냉철히 보자면 ‘코로나 사태’가 미칠 고통의 여파는 초입에 불과할 뿐이고 미증유의 위기(기후위기 더불어)가 올 수도 있다. 생명과 생계 위협에 더불어 기후위기로 물과 식량부족 사태와 같은 상황이 온다면 험한 폭력을 피해갈 수 없다. 이같은 ‘비관적 현실’을 어떻게 봐야할까?

250여년 전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문인인 볼테르는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매우 비관적인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볼 수 있을지 고민하는 책을 썼다. 불과 100페이지도 안되는 분량에 당시 세계에 걸친 비관적 삶을 조명한 책.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1759)를 통해서 우리를 엄습하는 비관적 미래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볼테르의 (철학적) 소설 『캉디드』를 읽게되면 꼭 불가능하지만은 않게 사람들은 고통의 상황에서도 웃기게 보일 수 있고 어떻게든 살아갈 희망을 놓치지 않는다면 실의속에서도 버티고 함께 살아갈 지혜를 모색해 볼 수 있어서다.

주인공 캉디드는 순진무구한 좋은 청년이다. 현재 독일 지역인 베스트팔렌의 성에서 남작의 딸, 아름다운 퀴네공드 공주와 첫키스를 했다가 쫒겨나면서 그는 고통스러운 모험에 휘말리게 된다. 군대에 잡혀가 맞아 죽고 처형당할 뻔하고(당시 ‘7년 전쟁’ 배경), 탄 배가 폭풍우에 침몰되고, 대지진을 겪으며 땅에 매몰 될 뻔하고(1759년 리스본 대지진),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태형을 당하는등 짧은 기간에 수차 생명의 위협을 당한다.

캉디드가 베스트팔렌 성에서 쫒겨난 후에 적의 기습공격을 받은 성에서 퀴네공드 공주의 삶도 처절히 짓밟히고 망가지게 된다. 부모가 살해당하고 본인은 강간당하고 적군의 하녀가 되었다가 포르투칼 거상에게 팔려가서 그의 정부가 된다. 베스트팔렌 성의 대학자이며 캉디드의 선생님이었던 ‘팡글로스 박사’는 현실의 세상이란 가능한 모든 상태중의 최상이라는 ‘낙관철학’을 설파했는데 캉디드는 그가 겪는 이 세상이 최선이라면 다른 세상이란 무엇인가 매번 혼란스러워한다.

볼테르는 그 특유의 건조한 위트와 반짝이는 아이러니로 섬뜩한 폭력을 제어해가면서 빠른 속도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도피한 캉디드의 모험을 보여준다. 배안에서 듣게 된 늙은 하녀의 삶은 몹시 참혹하다. 그는 교황과 공주의 딸로 이태리에서 태어났지만 해적선에 납치되어 강간당하고 모로코로 끌려갔다가 동쪽으로 계속 팔리다가 전쟁에 휘말려(오토만 제국과 러시아 전쟁) 심지어 엉덩이 한쪽을 먹히게 되기까지 하면서 러시아 귀족의 노예로 학대당하다가 도망쳐서 하녀일을 하면서 독일과 네델란드 쪽으로 흘러들다가 포르투칼 거상의 늙은 하녀가 되었다. 그는 수없이 자살하려 했지만 삶도 사랑해서 약해졌다고 하면서 자신이 본 무수한 고통의 피해자들 가운데 자살한 사람들은 단 12명이었다고 한다.

캉디드는 ‘수리남’에서 유럽의 설탕소비를 위해서 노동에 시달리다 손발이 잘려가며 학대당한 흑인 노예를 만나기도 하고 유럽으로 돌아가는 배표를 사다가 ‘엘도라도’에서 받은 선물인 그의 재산을 거의 사기당하면서 이전에 몇천배의 고통속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깊은 우울에 빠지기도 한다.

결국 캉디드의 모험도 끝나게 되고, ‘캉디드’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흩어져서 각각 폭력의 피해자들이 되어 세계를 떠돌다가 캉디드에 ‘구제’되어 오토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에서 떨어진 시골농장에 함께 모이게 된다. 유럽 종교권력의 위협과 사악한 사람들을 피해 오토만 제국의 작은농장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하지만 노예살이나 처참한 삶에서 구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인 사람들은 곧 지루해하면서 철학적 사변만 일삼거나 불평을 늘어놓는다. 게다가 사기를 수차 당했던 캉디드의 남은 돈도 다 떨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캉디드는 오렌지농사 짓는 이웃 노인의 초대를 받는데 거기서 지혜를 얻게 된다. 정치권력에 관심두지 않으면서 권태, 악덕, 결핍 없이 운치있게 사는 노인의 ‘밭갈아 사는’ 삶을 보고 돌아와 그의 친구들에게 ‘밭을 일구자’고 한다. 활기가 돌게된다.

18세기 중엽의 전쟁학살, 대지진, 해적선납치, 노예 인신매매, 강간, 사기, 종교재판 등 갖은 폭력의 피해자들이라도 먼 지역의 시골로 피난가서 함께 밭을 일구고 살아간다면 레몬과 피스타치오을 맛보며 ‘괜찮은 삶’을 구가하면서 회복될 수 있다고 볼테르는 독자들을 유혹하고 위안했다. 21세기의 우리는 전지구적 유행병이 지구생태 환경의 파괴에 기인하고 기후변화를 막지 않는 한, 전염병과 기후위기는 우리를 더욱 비관적인 미래로 밀어부치리란 것을 알고 있다. 코로나 전염병과 기후위기가 겹쳐서 발생시킬 앞날의 상상하기 힘든 고통을 맞게될 때 우리는 전 지구를 덮치는 재난을 피해서 다른 행성으로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볼테르의 18세기 캉디드같이 지구안의 ‘유토피아’(오토만 시골의 작은 농장)를 찾을 수 없는 21세기에 우리는 지구를 지켜내야만 한다. 코로나 위기와 기후위기를 초래한 이윤추구형의 산업체재를 바꿔서 생태를 복원해가면서 지구를 ‘우리의 밭’으로 가꾸어야 한다. 비관적 미래를 이기기 위해 이젠 ‘지구밭’을 가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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