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 김기덕, 이윤택 등 한국 사회를 뒤흔든 문화예술계 성폭력 고발에 우리 국회는 언제야 응답할까. 20대 국회가 꼭 마련하겠노라고 약속했던 문화예술계 노동환경 개선 법안들이 모두 이달 말 국회 임기 종료와 함께 폐기될 위기다.

국회 계류 중인 ‘성평등·안전한 문화예술 노동환경’ 법안
5월 13일 기준 국회 계류 중인 ‘성평등·안전한 문화예술 노동환경’ 법안들

 

국회 계류 중인 성평등·안전한 문화예술 노동환경법안

이달 29일 지나면 폐기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예술인의 지위 및 권리보장에 관한 법률,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 개정안, 문화예술진흥법 개정안 등 6개 법안은 예술인들이 평등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활동할 권리를 폭넓게 보장할 제도적 기반이다그러나 이 중 4개 법안은 13일 기준 소관 상임위인 문화체육관광위원회도 통과하지 못했다. 문체위에서 의결된 2개 법안도 이달 내 법제사법위원회, 본회의를 통과하지 못하면 20대 국회 임기 종료와 함께 폐기된다.

문화예술인 70%가 프리랜서·계약직

기존 성폭력방지대책 사각지대 해소할

예술인권리보장법아직도 국회에

문화예술계 성폭력은 2016년 트위터에서 시작된 ‘#OO_성폭력고발 운동으로 시작돼, 2018년 미투 운동, 2019년 체육계 성폭력 고발 등으로 이어졌다. 유명 연출·감독·배우·연예기획사 대표 등이 폐쇄적인 집단에 군림하며 우월적 지위를 악용해 저지른 폭력이 드러났다.

한국 사회는 충격에 빠졌지만, 대응은 또 다른 문제였다. 기존 성폭력 방지정책은 공공기관·학교 등 조직 위주다. 그러나 문화예술인의 70% 이상은 프리랜서·계약직이다. 고용이 불안정하고, 노동법상 근로자 지위를 인정받지 못해 노조 결성 등 조직적인 대응도 어렵다. 사건을 제대로 조사하고 가해자를 징계할 근거와 절차도 미비하다. 자연히 피해자-가해자 일대일 대응 구도가 만들어졌고, 피해자들은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거나 침묵했다. “문화예술계 성폭력 방지정책의 핵심은 프리랜서라는 조건에서 기인한 법제도의 사각지대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지에 있다고 이성미 여성문화예술연합 대표는 말한다.

국회의 응답은 무엇일까. 문체위 소속 김영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예술인권리보장법성평등한 예술환경 조성을 법률의 목적에 포함하고, ‘예술인은 예술 활동에 있어 성별에 따른 차별 등이 없이 인권을 동등하게 보장받고 성희롱·성폭력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고 명시한다. 또 정부 차원에서 예술인 성희롱·성폭력 방지 대책을 수립하고, ‘2년마다 성희롱·성폭력 실태조사를 하고 결과를 발표할 책무도 부과한다. 지난해 4월 발의됐지만 약 1년 만인 지난 7일에야 문체위를 통과했다. 

여성·예술단체 등으로 구성된 이윤택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19일 1심 판결 직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여성·예술단체 등으로 구성된 이윤택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2018년 9월 19일 1심 판결 직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예술단체 성폭력예방교육 의무화

성범죄 예술단체장 해임

영화 노동환경 실태조사·개선

아동·청소년 예술인 노동인권 보장

근거 법안들 아직 상임위도 못 넘어

예술인 대부분이 업계에 들어온 이후 성폭력 예방교육이나 성인지 감수성 관련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도 중요한 문제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지정한 전문예술법인 단체의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을 의무화하고, 위반 시 단체 지정을 취소할 수 있게 한 문화예술진흥법 일부개정법률안’(남인순 민주당 의원 2018년 대표발의)이 주목받은 이유다. 2017년 말 염동열 자유한국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 일부개정법률안은 대중문화예술기획업자(연예기획사)가 소속 연예인·연습생에게 성폭력 예방교육을 제공하고, 위반하면 과태료로 최대 300만원을 내게 한다.

많은 가해자들이 공적 지원을 받거나 국립예술단장, 국립학교 교수 등 공공기관 고위직을 차지한 일이 비판받자, 2018년 문체부는 성폭력 행위자를 제명하고 공적 지원을 배제하도록 했다. 더 나아가 전문예술법인 단체장이 성범죄로 형이 확정되면 단체장을 변경(해임)하고, 위반 시 단체 지정을 취소할 수 있도록 한 문화예술진흥법 일부개정법률안’(장정숙 민생당 의원 대표발의)도 2018년 발의됐다.

한편 영화계 성폭력 고발 운동은 영화 현장의 불합리·불공정한 노동 실태가 성폭력과 맞닿아 있음을 드러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영화계 노동 환경 실태조사를 벌이고, ‘표준계약서 권장과 인권존중 의식·양성평등 문화 확산을 영화진흥기본계획, 영화진흥위원회의 심의 의결 사항, 영화진흥기금의 사용 용도에 담도록 하는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진선미 민주당 의원 대표발의)이 2018년 발의됐다.

2017년 8월 8일 서울변호사회관에서 열린 '김기덕 감독 사건 공동대책위원회 기자회견' 현장. ⓒ뉴시스·여성신문
2017년 8월 8일 서울변호사회관에서 열린 '김기덕 감독 사건 공동대책위원회 기자회견' 현장. ⓒ뉴시스·여성신문
12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개소 기념행사와 영화계 성평등 환경 조성을 위한 성폭력·성희롱 실태조사 결과발표 및 토론회가 열렸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2018년 3월 12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개소 기념행사와 영화계 성평등 환경 조성을 위한 성폭력·성희롱 실태조사 결과발표 및 토론회가 열렸다. ⓒ이정실 여성신문 사진기자

 

아동·청소년 예술인의 노동인권 보장도 중요한 입법 이슈다. 최근 EBS ‘보니하니출연자 폭행 의혹처럼 아동·청소년이 촬영 현장에서 겪는 폭력, Mnet ‘아이돌학교출연자들의 장시간 고강도 노동, 출연료를 부당하게 떼인 배우들의 사례, 유튜브 수익을 부모가 멋대로 사용한 사례 등이 알려졌다. 올해 1월 아동·청소년 예술인 노동인권 개선을 위한 시민단체들의 연대체 팝업(Pop-Up)’은 국회 토론회에서 관련 사례를 공유하고 입법 개정을 촉구하기도 했다. 민병두 민주당 의원은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들의 연령대별 1일 노동 시간 한도를 정하고, 심리상담·치료 지원, 재산권 신탁 및 제재 규정 신설 등의 내용을 담은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 개정안을 지난해 8월 대표 발의했다.

일 안하는 국회책임 커

문체위 4년간 회의 5번뿐...발의율도 낮아

이대로 21대 국회로 넘어간다면

코로나19에 이어 예술계 또다른 위기

그러나 이들 법안 모두 이달 말 20대 국회 임기가 끝나면 폐기될 위기다. 2018년부터 드루킹 특검 도입, 패스트트랙 법안 문제 등으로 20대 국회가 장기 파행을 거듭한 탓이 크다. ‘일 안 하는 문체위도 책임이 있다. 문체위는 지난 4년간 법안심사 소위를 고작 5회 개최해 가장 일 안 하는 상임위오명을 썼다. 5월 임시국회가 열릴 가능성이 있지만, 문체위원장 안민석 민주당 의원은 지난 7일 회의에서 오늘이 20대 국회 문체위 마지막 상임위가 될 가능성이 크다. 문화예술인 고용보험, 영화·관광 종사자 지원을 위한 입법 등이 본격 논의되지 못하고 21대 국회의 과제로 남게 됐다고 다음 국회로 공을 떠넘기는 발언을 했다.

문체부 성희롱·성폭력 예방대책위원회 소속으로 관련 입법에 힘써온 이성미 여성문화예술연합 대표는 “20대 국회 4년간 문화예술계 노동인권을 개선하려는 노력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소관인 문체위원들의 법안 발의율은 턱없이 낮았다. 주요 법안도 여성가족위원회 등 타 위원회 소속 의원들이 발의한 경우가 더 많다. 그나마 법사위에서 제동을 거는 경우가 많다. 법사위가 현장과 소관 부처의 의견에 더 귀 기울이고 협조하려 노력하길 바란다고 했다. 최근 각 정당이 문화예술인 권리보장 정책을 21대 총선 공약으로 내놓은 일을 두고 “20대 국회에서 이미 약속했던 것이니 20대 국회에서 마무리해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문화예술 강국을 이룰 길은 예술가의 지위를 보장하고, 공정하고 안정적인 창작환경을 조성하는 길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1980년 유네스코는 예술가의 지위에 대한 권고를 채택해 예술가의 사회적 역할과 지위를 법적으로 보장하라고 권고했다. 영국·프랑스·독일·캐나다 등에서는 문화예술 융성과 사회적 안전망 구축의 연관성을 적극적으로 인식하고 예술인 고용보험, 연금 제도, 의료보험, 저작재산권 보호 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생활고에 시달리다 사망한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씨의 죽음으로 2011예술인복지법이 제정됐고 이듬해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설립됐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이 대표는“문화예술계 성폭력 방지정책은 오랜 시간 존재하지도 않았다가 이제야 시행되고 있다. 정권이나 담당자가 바뀌어도 정책이 흐지부지되지 않고 정착하려면 법제화가 꼭 필요하다며 예술인들은 국회에 계류된 관련 법안들을 회기 끝까지 물고 늘어져 최대한 통과시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대로 21대 국회로 공이 넘어간다면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아 힘들어하는 예술인들에게 또 다른 위기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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