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성·재생산 의료기관 94%
피임·낙태 등 서비스 지원 축소
관련 지역병원·공공의료시설
78%는 아예 문 닫아

 

만일 당신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속 원치 않는 임신을 했다면 어떡해야 할까? 정부의 이동 제한령이나 격리 조처로 산부인과에 가기 어렵다면? 병원에 갈 돈이 없어서 국제 구호 단체에 ‘임신중지’(낙태) 약물을 신청했는데, 약물 공급이 끊겼거나 배송 서비스가 중지됐다면? 정보나 도움을 받지 못하고 홀로 해결책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1년이 흘렀지만, 예기치 못한 코로나19 위기 앞에서 여성이 안전하게 섹스하고 임신을 중지할 권리는 여전히 위태롭다.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코로나19 비상체제를 틈타 여성의 성·재생산 건강 관련 의료서비스를 ‘필수적이지 않은’ 서비스로 분류해 중지하거나 축소하려는 사례가 전 세계적으로 늘었다. 일부 지역에선 임신중지 금지 법제화를 시도 중이다. 여전히 ‘낙태는 죄’인 현실이다. 전문가들은 “피임과 안전한 임신중지를 포함한 여성의 성·재생산 건강권은 감염병과 무관하게 존중돼야 한다”며 인식 전환과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코로나19 상황을 틈탄 폴란드 정부의 임신중지 규제 강화 시도에 반대하는 유럽 페미니스트들의 연대 시위. ©YoungFeministEU 트위터 캡처
코로나19 상황을 틈탄 폴란드 정부의 임신중지 규제 강화 시도에 반대하는 유럽 페미니스트들의 연대 시위. ©YoungFeministEU 트위터 캡처

 

이동제한·병원 폐쇄로 임신중지 지원↓
여성의 성·재생산 건강 위협 커져

피임, 임신중지, 성병 검사 등 성·재생산 건강 관련 의료서비스는 코로나19 대유행 이래 전 세계적으로 축소되고 있다. 지난달 22일 성·재생산 건강권 NGO ‘국제가족계획연맹(IPPF)’은 “유럽 성·재생산 건강 관련 의료기관 94%가 서비스 지원을 줄였고, 관련 지역 병원·공공의료 시설 78%는 문을 닫았다”고 밝혔다. IPPF 자체 의료기관 및 의료서비스 제공업체 중 14%(5600개소 이상) 업체가 코로나19로 인해 총 64개국에서 문을 닫았다. 폴란드에서는 시민들의 불안이 커지면서 일찍부터 피임도구와 호르몬 대체 요법제 재고 품절 사태가 벌어졌다. 영국 성·재생산 건강 관련 NGO ‘마리 스톱스 인터내셔널’(MSI)은 “코로나19로 인해 우리 단체의 지원을 못 받게 된 사람이 최대 950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임신중지 지원이 필요한 여성들에게 소액 기부를 받고 안전성 높은 임신중지유도약물을 국제우편으로 보내주는 NGO ‘위민온웹(Women on Web)’, ‘위민헬프위민(Women Help Women)’도 약물 공급·유통 차질을 우려하고 있다.

감염병 대유행이 길어질수록 여성의 성·재생산 건강권은 위협받는다. “저소득·중간소득 국가에서 피임도구 사용이 10% 감소하면 여성 4900만명이 피임을 못 하게 되고, 1500만 건의 의도치 않은 임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 임신과 신생아 관련 지원서비스 공급이 10% 줄면, 산모 사망 2만8000건, 신생아 사망 16만8000건으로 이어질 수 있다. 임신중지 시술이 ‘비필수’ 진료로 분류되거나, 해당 의료기관이 폐쇄돼 위험 속에서 진행되는 임신중지가 전체 임신중지의 10%에 달한다면, 300만건의 위험한 임신중지와 산모 사망 1000건으로 이어질 수 있다. (...) 이는 보수적인 추정치이며, 실제 피해는 훨씬 클 수 있다.” 성·재생산 건강권 연구단체인 미국 구트마허 연구소가 지난달 16일 발표한 보고서의 일부다. 

©여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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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미 일부 지역 ‘임신중지 처벌강화’ 추진
영국, 병원 안 가도 집에서 임신중지약 복용 허용

코로나19 사태를 틈탄 임신중지 금지 법제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4년 전 여성들이 ‘검은 시위’ 끝에 임신중지 금지 법안을 철회시켰던 폴란드에서는 최근 비슷한 법안이 재등장했다. 기존 법안이 허용하는 ‘태아가 기형이 있는 경우’조차 임신중지를 금지하는 억압적 법안이다. 우파 민족주의 성향 집권 ‘법과 정의당’(PiS)이 다수인 폴란드 하원에서 표결 추진 중이다.

폴란드 여성들은 또다시 시위에 나섰다. SNS에선 해시태그 ‘‘#NieSkladamyParasolek(우리는 우산을 접지 않는다 – 2016년 검은 시위 당시 비가 내려 우산을 들고 시위한 이래로 우산은 폴란드 페미니즘의 상징이 됐다)’ ‘#ProtestAtHome(집에서 시위하기)’를 사용하는 온라인 시위가 진행 중이다. 정부의 봉쇄령에도 불구하고 지난달 말 폴란드 시민들은 타인과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거리로 나오거나, 자가용을 탄 채 가두 시위를 벌였다.

미국에선 루이지애나, 아이오와, 아칸소, 앨라배마, 오하이오, 웨스트버지니아, 테네시, 텍사스 주 등 8개 주 당국이 ‘임신중지 금지 법제화’에 나섰다. 이들 주 당국은 코로나19 상황에서 임신중절 시술이 ‘비필수적 서비스’이므로 금지한다는 명령을 내리고, “의료진의 개인보호장비를 절약하고 환자와의 접촉을 줄여 감염 확산을 막자는 취지”라고 주장했다.

미 연방법원은 이런 시도를 줄줄이 기각했다. 미국의사협회(AMA)는 “일부 주에서 코로나19 상황을 빌미로 여성의 재생산 건강권을 착취하고 있다”는 규탄 성명을 냈다. 하지만 이미 많은 여성과 의료진들이 불안해하고 있고, 임신중지 시술을 받기 위해 다른 주나 타국으로 위험한 여행을 감수하려는 여성들이 늘고 있다고 현지 언론과 NGO들은 전했다.

반면 영국 정부는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성이 병원을 찾지 않고도 집에서 임신중지 유도약물을 복용할 수 있게 해 주목받았다. 지난 3월 말부터 코로나19 위기가 종식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임신 10주 이내의 여성이 전화나 온라인 상담을 거쳐 집에서 임신중지 약물을 받아 복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아일랜드 정부도 임신 10주 이내 전화 상담을 거쳐 집에서 임신중지 약물을 복용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 프랑스 정부는 약물 이용 임신중지 기한을 기존 임신 7주 이내에서 9주로 확대하는 긴급 법안을 발표했다. 

©여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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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폐지’ 1년…변화 없는 한국
개선 입법·정책 부재 속 암시장 활개

한국 상황은 어떨까.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처벌조항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온 지 1년이 지났지만 개선 입법은 더디다. 임신중지 관련 의료서비스는 여전히 공식 의료체계에 포함되지 않았다. 보건복지부가 3월부터 한시적으로 환자가 의료기관을 방문하지 않고도 전화 상담을 기반으로 한 처방·대리 처방을 받을 수 있도록 허용했으나, 임신중지 관련 조처나 언급은 빠졌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한 한국 여성들은 아직도 불법유통 약물을 찾거나 은밀하게 병원을 물색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트위터 등 SNS에는 매일같이 미프진 판매글, 약물 복용·시술 상담 광고가 올라온다. ‘낙태죄 폐지’ 이전과 달라진 게 없다. 이유림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기획운영위원은 ‘3월 셰어 이슈페이퍼’에 쓴 ‘코로나19와 임신중지’라는 글에서 “온라인에서는 블랙마켓이 더욱 활개를 치고 있다”며 “젠더폭력으로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 여성들이 재생산 건강 보장을 위한 종합적인 대책 부재 속에서 생명을 위협당하는 상황”이라고 비판했다.

보건의료 전문가들은 각국 정부와 세계보건기구(WHO)에 임신중지를 코로나19 대유행 동안 ‘필수 의료서비스’로 선언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WHO는 3월 말 공개한 ‘코로나19 확산 기간 필수 의료서비스 유지를 돕는 임상지침’에서 “피임과 안전한 임신중지를 포함한 여성의 성과 재생산 건강권은 코로나19 상태와 무관히 존중돼야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감염병과의 장기전에서 승리하려면 방역만이 아니라 소수자의 건강권을 보장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게 이들의 요지다. 한국의 코로나19 방역은 세계 표준이 됐다. 진정한 ‘공중보건 선진국’으로 남으려면, 위기 속에서도 여성이 언제나 안전한 피임과 임신중지를 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김선혜 이화여대 여성학과 조교수는 “(한국에서는)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약물 임신중지 관련 법제도는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고 “여전히 팽배한 사회적 낙인 속에서 임신중지를 재생산 건강의 측면에서 필수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의료행위로 여기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여러 국가들이 신속하게 약물 임신중지와 관련된 새로운 가이드라인과 기준들을 마련하고 있는 것은 어떠한 재난 위기의 상황에서도 임신중지는 필수적인 의료서비스로서 제공되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며 한국에서도 미프진 도입과 필수 의약품 지정을 서둘러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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