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년 전 성폭행범 혀 깨물어 수감된 여성, 법원에 재심 청구
56년 전 성폭행범 혀 깨물어 수감된 여성, 법원에 재심 청구
  • 김서현 기자
  • 승인 2020.05.06 16:23
  • 수정 2020-05-06 16: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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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성폭행 저항 중 혀 깨물어 상해죄로 수감
"재심 통해 원통함 풀겠다"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여성의전화

 

1964년 5월6일, 당시 18세였던 최말자(76)씨는 성폭행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가해자 노모(당시 21세, 77)씨의 혀를 깨물어 상해를 입혔다. 이를 두고 검찰은 최씨의 행위를 과잉방위로 보고 구속했다. 부산지방법원은 최씨에게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56년만에 이 사건을 두고 피해자가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부산여성의전화 등 353개 여성·시민단체가 6일 오후 1시 부산지방법원 정문 앞에서 성폭행 피해자의 정당방위 인정을 위한 재심 개시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에는 피해 당사자 최씨도 함께 했다.

최씨는 “사법이 변하지 않으면 우리 후세까지 나 같은 피해가 이어질 수 있겠다는 절박한 생각에 이 자리에 섰다”며 “억울함이 풀리고 정당방위가 인정돼 무죄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당시 최씨는 수사 시작과 동시에 아무런 고지 없이 상해죄로 구속됐다. 최씨는 구속 후 수감된 상태로 6개월여간 수사 재판을 받았다. 법원은 노씨에 대해서는 강간미수 등의 혐의를 적용하지 않았다. 다만 최씨의 구속 이후 결혼을 요구하며 최씨의 집에 잇따라 침입한 건에 대해서만 특수주거침입과 특수협박 혐의로 기소했다.

재판부는 최씨에게 “피고에게 호감이 있었던 게 아니냐”거나 “피고와 결혼해서 살 생각은 없는가” 등의 2차 가해도 가했다. 언론 또한 ‘키스 한 번에 벙어리’, ‘혀 자른 키스’ 등 가해자인 노씨 입장에서 보도를 이어나갔다.

최씨의 변호를 맡은 김수정 변호사는 "법학도로서 교과에서 보던 사건의 피해자가 제 앞으로 걸어 나왔을 때 온몸에 인 전율을 잊지 못한다"며 "최근 법원 판결에서 언급되는 성인지 감수성은 변화된 시대 감수성이 아니라 보편적 가치"라고 강조했다.

이어 "피해자는 성폭력 피해자로 사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가해자 범죄 유발 책임도 받았다. 피해자는 이 사건으로 평범한 삶이 완전히 뒤바뀌고 힘들게 살아왔다"고 재심 인정을 촉구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안희정 사건을 폭로한 김지은씨도 응원의 편지를 보냈다. 김씨는 "구속되는 날 하루종일 비가 쏟아진 것도 기억한다고 들었다. 지금 선생님 곁에는 많은 분들이 함께하고 있으며 홀로 고통속에 있지 않도록 곁에 굳건히 있다"며 "선생의 상처가 치료되고 한이 풀리는 길에, 여자라는 이유로 고통받지 않는 세상을 위해 함께 싸우겠다"고 전했다.

해당 사건은 법원행정처가 법원 100년사를 정리하며 1995년 발간한 『법원사』에 ‘강제 키스 혀 절단 사건’으로 소개됐다.

최씨 사건이 일어나고 24년 후에도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 1988년 9월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원은 2월 골목에서 강제로 입맞춤 하려는 남성 신모(19)씨의 혀를 깨물어 자른 30대 여성에 대해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죄를 적용해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일명 안동 주부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박원순 등 7명의 인권변호사들이 나서며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는 데 성공했다.

이날 기자회견을 마치고 최씨와 최씨의 공동법률대리인단, 여성단체는 부산지방법원에 재심청구서를 접수했다. 

다음은 기자회견문 전문.

법원은 재심을 개시하여 성폭력 피해자의 정당방위 인정하고,

피해자의 인권 회복에 책임을 다하라! 

56년 전 오늘, 1964년 5월 6일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의 피해자는 중상해죄로 6개월여간 구속되었고 유죄판결을 받았다. 성폭력 피해를 방어하기 위한 행위가 정당방위로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날의 부당한 판결로 인해 피해자는 오랜 기간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그럼에도 피해자는 언젠가는 당시 수사·재판과정의 문제점을 알릴 것이며, 자신의 방어행위가 정당방위로 인정될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피해자는 2018년 미투 운동을 보며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여성폭력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하였고, 자신의 사건 해결을 통해 혼자서 상처를 끌어안고 있을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용기가 되기를 바라며 재심을 청구하게 되었다. 

이 사건의 피해자는 성폭력 피해보다 사법기관의 태도로 인해 더 괴로웠다고 한다. 가해자의 편에 선 사법기관은 피해자에게 가해자가 원하는 대로 할 것을 종용하였다. 돈을 주거나, 가해자와 결혼을 하라는 것이었다. 검찰은 아무런 고지 없이 조사를 받으러 온 피해자를 그 자리에서 구속했고, 재판부는 가해자에게 길을 안내한 피해자의 행동이 가해자가 성폭력을 시도하게 된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며 피해자에게 '도의적 책임'을 물었다. 이렇게 당시 사법기관은 성폭력 피해자의 인권을 완전히 묵살했다. 강간하려다 '피해자의 방어'로 인해 미수에 그친 가해자의 범행에 대해서는 기소조차 하지 않고, 피해자의 집을 찾아와 흉기로 협박했던 가해자를 불구속으로 수사했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가해자의 서사에는 쉽게 동조하면서 피해자의 진술을 의심하고, 피해자를 비난하고, 폭력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사법기관의 모습은 2020년 현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법기관은 피해자에게 왜 저항하지 못했는지, 벗어날 수 없었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물으면서도 적극적으로 저항한 피해자에게는 도리어 또 다른 책임을 묻는다. 여성폭력이 발생하는 맥락과 피해자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사법기관의 인식으로 인해 피해자의 방어행위는 '쌍방폭력' 등으로 가해자의 범죄 행위와 동일한 것으로 취급받는다.

1988년, 본 사건과 유사한 사건에 대해 피해자의 정당방위를 인정한 첫 판결이 있었지만, 이후 또 다른 유사 사건에서는 정당방위가 인정되지 않는 등 여전히 여성폭력 피해자들의 방어행위가 정당방위로 인정되는 것은 제한적이다. 가정폭력 가해자를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에서 피해자의 정당방위가 인정된 판례는 아직 없다. 

여성인권의 역사는 여성폭력 피해자의 말하기로 이어져 왔다. 56년 전 오늘 발생한 성폭력 사건의 부당했던 수사 과정과 잘못된 판결을 바로 잡는 일은 한 성폭력 피해자의 삶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일 뿐 아니라, 이와 같은 상황에 놓인 다른 여성들의 삶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기도 하며, 여성폭력을 부당하게 처리해 온 사법기관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 될 것이다.

여기 모인 385개 여성‧시민사회단체는 오늘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성폭력 피해자의 정당방위 인정을 위한 재심이 개시되고, 피해자에게 정의가 실현될 때까지 함께 할 것이다. 우리는 법원이 성폭력 사건에 대한 오랜 잘못을 성찰하고 여성의 방어권 보장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합당한 응답을 할 것을 요구하며, 여성폭력 사건의 사법 정의 실현을 위해 끝까지 싸울 것이다. 

 2020년 5월 6일

성폭력 피해자의 정당방위 인정을 위한 재심 개시를 촉구하는 여성∙시민 사회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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