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티모어시에는 박물관이 무려 십여 개. 지역 사회에서 이렇게 자신들의 역사적 뿌리를 갈무리해가고 있는 노력은 우리도 배워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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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볼티모어 예술박물관(Baltimore Museum of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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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B&O 철도 박물관(B&O Railroad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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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맥헨리 기념관(Ft. McHenry National Monument) 전경.

볼티모어시 박물관, 기록 의지 표현

지역에서 역사뿌리 갈무리하는 노력

이번 미국 여행에서 인상깊었던 것은 지역 박물관이었다. 볼티모어 시내에는 무려 십여 개의 박물관들이 있다. 독립기념일 전날이라 지도를 보고 물어물어 찾아간 박물관들은 대개 문을 닫아서 두 군데밖에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박물관 이름과 박물관 앞의 박물관 소개 기록을 통해 거의 모두가 개척 시기와 남북전쟁 당시 북의 중심지였던 항구 도시 볼티모어의 역사를 주제별로 접근해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볼티모어 남북전쟁 박물관’, ‘진주 박물관’, ‘전쟁 기념관’, ‘해양 박물관’, 볼티모어시에 유태인이 정착하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는 ‘유태인 박물관’, ‘공공 토목공사 박물관’,‘흑인 위인 박물관’, ‘해양 박물관’, ‘볼티모어 산업 박물관’, 국립 기념물과 역사적 성지 기록을 보여주는 ‘맥헨리 기념관’, 미해군사에서 돛을 단 마지막 전함인 콘스텔레이션호에 대한 기록과 자료를 보여주고 있는 ‘미함대 콘스텔레이션 박물관’ 등이 볼티모어 시의 박물관들이다.

‘볼티모어 남북전쟁 박물관’에는 링컨 당시의 남북전쟁을 전후한 미국의 상황과 관련 인물들, 전쟁의 전개를 보여주는 사진과 기록, 서적들을 전시하고 있었고 만화와 사진으로 남북전쟁 당시 볼티모어 상황을 15분 정도 소개해주는 비디오를 상영했다.

박물관들은 크지 않았다. 대개 내부는 30∼40평 규모로 보였다. 따라서 박물관 내부를 샅샅이 관람해도 한두 시간이면 충분했다. 관람자들은 대여섯 명에 불과했다.

이런 지역 박물관들의 규모는 너무나 소박해서 관광객 관람이 일차적 목표라기보다는 볼티모어시가 자기 역사를 기록해가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였다. 다인종의 이민자들이 모여 이룬 미국 사회가 통합을 유지해 갈 수 있는 것은 핵가족의 견고함(사실 미국 방문 전 나는 미국에 대해 딩크족(DINK,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영위하면서 의도적으로 자녀를 두지 않는 맞벌이부부), 딘스족(DINS, 맞벌이 가정 중 거의 성생활을 하지 않는 부부) 등의 이미지로 가족해체의 원조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볼티모어 항구 주변의 주말 공원은 가족 단위의 나들이 인파로 넘쳐났다), 아직까지는 세계 최고인 국력 외에 지역 사회에서 이렇게 자신들의 역사적 뿌리를 갈무리해가고 있는 노력에 기반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박물관들은 당연히 볼티모어 시 학생들의 지역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을 것이다.

지역 박물관 통한 간접 체험으로

역사 아픔, 평화 소망 담는 기회 필요

이 지역 박물관들을 보면서 나는 내 사는 곳의 서초구 종합 서초사회복지관을 떠올렸다. 일제 시대에는 아마 면 사무소쯤 됐던 것 같고 그 연고로 6.25 때는 국군과 북한군의 승패에 따라 우익, 좌익이 상대를 학살하던 학살장이기도 했다. 그 이후 내가 버스를 타고 오가며 본 그 곳은 10여 년 간 어린이집이었고 1980년 대 중반에 사회복지관으로 재건축 돼 그때부터 지금까지 주민들을 위한 복지 사업을 하고 있다.

우연히 이 건물의 역사를 알게 된 이후, 이 곳을 지나칠 때면 그냥 지나쳐지지 않고 눈가가 뜨겁게 달아오름을 느낀다. 그러면서 친정 어머니의 도움을 받기 위해 정착을 했고 큰 아이를 기르면서, 그리고 공동육아를 하면서 많은 이웃을 만나면서도 고향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던 이곳이 비로소 ‘아 내 고향이구나. 내게도 고향이란 게 이제 생겨가는구나’라는 생각이 일어난다. 역사는 내 뿌리를 말해주는 얼이고 마음이다.

여전히 학교에서는 일제 식민지 시대와 군사 정권 독재 시대의 포스터 그리기, 글짓기와 같은 관료적 교육 방식으로 아이들에게 통일, 환경과 경제 살리기 등등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려 한다. 한편 평화운동을 하는 쪽에서는 평화교육 방법론의 국내적 부재를 아쉬워한다.

이 복지관이 건물 한쪽에 작은 방 하나를 ‘볼티모어 남북전쟁 박물관’처럼 이 건물의 역사를 말해주는 방으로 꾸민다고 상상해보자. 1시간쯤 이 공간을 체험하는 아이들에게는 분단의 아픔과 평화에 대한 소망이 자연스럽게 일어나지 않겠는가? 굳이 효과 없는 글짓기 대회로 강요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그 날 밤 간접 체험한 역사의 아픔과 평화적 소망을 담는 일기를 쓰지 않겠는가?

5000년 역사를 가진 우리는 경주까지 내려가지 않는다 해도 곳곳이 역사 체험이 가능한 장이다.

도심에 들어가면 큰 빌딩이 들어선 자리에 ‘이 곳은 누구누구 생가였다’는 사방 50cm 정도의 비문 하나가 입구에 있는 곳들이 있다. 그 빌딩 한쪽에 20여 평의 작은 방 하나라면 그 공간의 역사를 담을 수 있고 그 공간은 우리에게 살아 있는 역사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예산이 드는 일도 아니다. 자치단체가 그리고 지역의 시민단체가 충분히 기획하고 실행해볼 수 있는 작업이다.

동양에서는 ‘마음’으로 칭해지는 존재의 심급의 층이 최근 서구에서는 사고 지능(IQ), 감정지능(EQ:Emotional Quality)보다 심층 지능인 영성 지능(SQ:Spiritual Quality)으로 언급되기 시작했다. 최근 국내에 많은 수련 인구가 생기고 있는 것은 근대 문명과 삶의 황폐함의 끝에서 삶의 궁극적 의미를 찾고 그 의미 속에서 자기 삶을 갈무리해가고자 하는 존재적 욕망이 작동하기 시작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 역시 마음, 영성을 찾아가는 한 축일 뿐이고 또 다른 한 축은 성찰적으로 음미되고 간접 체험될 때, 창조적 힘으로 작용하게 되는 문화와 전통이다. EQ라는 책을 쓴 옥스퍼드대 다나 조하(Danah Zohar) 교수는 개인은 자기 문화와 전통을 통해서만 영적 중심과 관계하며 이런 면에서 현대의 개인은 심각한 영양결핍 상태라고 말한다.

우리 자신과 우리 아이들을 이 심각한 영양결핍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하나의 방안으로 지역 박물관을 진지하게 고민해보자!

김정희/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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