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의 국호는 ‘미얀마연방공화국’(The Republic of the Union of Myanmar)이다. 원래는 버마 연방(The Union of Burma)이었으나, 1962년 네윈의 쿠데타 이후 정권을 장악해 온 미얀마 군사정부는 1989년 국호를 ‘미얀마’로 바꾸었다.

양곤 시내 아웅산 수치 여사의 사저, 옛 버마 국기가 걸려있다. ©조용경
양곤 시내 아웅산 수치 여사의 사저, 옛 버마 국기가 걸려있다. ©조용경

 

아웅산 수치 여사는 반독재 투쟁 당시 ‘미얀마’라는 국호를 부인했으나, 2015년 11월의 총선 승리로 정권을 잡으면서 ‘미얀마와 버마를 함께 사용할 것’이라고 선언하여, 국호에 관한 논란은 종식되었다.

미얀마는 면적이 67만8500㎢로서, 남북한을 합한 면적의 3배가 넘는 광활한 나라이다. 미얀마에는 135개 민족이 있으며, 미얀마 정부가 2014년 봄에 발표한 총인구는 5100만명, 그러나 6000만 명은 넘는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바간 지역의 파고다들. ©조용경
바간 지역의 파고다들. ©조용경

미얀마는 5월부터 10월 초까지는 우기로 비가 많이 오며, 11월에서 4월 초까지의 기간은 건기로 비가 오지 않는다.

미얀마 최초의 국가는 기원전 2~3 세기 경, 티벳 계통의 종족들이 세운 퓨(Pyu)라는 도시국가이며, 이 무렵 인디아로부터 불교가 전래되어 미얀마의 문화나 사회상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1050년 무렵에 아노라타(Anawrahta)라는 걸출한 인물이 오늘날의 미얀마 대부분을 아우르는 최초의 통일 국가 ‘바간’을 세웠다. 아노라타 왕은 통일국가의 지도이념으로 테라바다(Theravada, 상좌부) 불교를 받아들였고, 그 이후 약 1세기에 걸쳐 오늘과 같은 미얀마 불교문화의 바탕이 마련되었다.

미얀마에 두 번째 통일왕국이 이루어진 것은 16세기 중반에 형성된 타웅우(Taungoo) 왕조에 의해서였다. 타웅우 왕조의 2대 왕인 바이나웅(Bayinaung)왕은 미얀마 전역과 태국의 아유타야 왕국까지를 점령하여 광대한 국가를 형성했다.

18세기 중엽 알라웅파야(Alaungphayar) 왕이 세 번째로 전국을 통일하고 콘바웅(Konbaung) 왕조를 수립하게 된다. 미얀마에서는 바간 왕국의 아노라타 왕, 타웅우 왕국의 바이냐웅 왕, 그리고 콘바웅 왕국의 알라웅파야 왕을 미얀마 통일을 이룩한 3대 영웅으로 손꼽는다.

미얀마 삼군사관학교 정문의 미얀마 3대 영웅 동상. ©조용경
미얀마 삼군사관학교 정문의 미얀마 3대 영웅 동상. ©조용경

 

콘바웅 왕조는 3 차례에 걸친 영국-버마 전쟁에서 패하여 1885년에 멸망하고 말았다.

1942년 일본이 영국을 내쫓고 괴뢰 정권인 ‘자유 버마’를 세웠으나,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다시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1948년 1월 4일에 독립을 이룩했다.
오늘의 미얀마를 이해하려면, 독립의 영웅 ‘아웅산 장군’(Bogyoke Aung San)과 1962년의 쿠데타로 집권하여 50년 군사통치의 문을 연 ‘네윈 장군’(Ne Win), 그리고 현재의 집권자인 아웅산 수치 여사를 알아야 한다.

‘보조욱 아웅산’(1915년2월~1947년7월)은 영국과 일본으로부터의 미얀마(버마)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군인이자 혁명가이며 정치인이었다.

미얀마 독립의 영웅 아웅산 장군.
미얀마 독립의 영웅 아웅산 장군.

 

1915년 마궤 관구의 낫마욱(Natmauk) 마을에서 태어난 아웅산은 1933년 최고명문인 랭군 대학교(현 양곤 대학교)에 입학했다.

1936년 아웅산은 버마전국대학생연맹(ABSU) 위원장이 되었고, 대학을 졸업하면서 민족주의 조직인 ‘우리 버마인 연맹’(Dobama Asi Ayone : We Burmans Association)에 가입했고, 이듬 해에 이 조직의 총서기가 됐다.

양곤 시내에 있는 아웅산 장군 동상. ©조용경

1940년 영국군의 체포령을 피해 중국으로 탈출한 그는 1942년 2월, 버마를 독립시켜주겠다는 일본의 유혹에 넘어가 ‘30명의 동지들’(Thirty Commrades)과 함께 일본의 군사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다. 12월에는 방콕에서 버마독립군(Burma Indepence Army, BIA)을 결성했으며, 일본군대와 함께 미얀마로 진격하여 영국 군대와 전투를 벌렸다. 그러나 이런 행보는 3년 간의 일본 식민지배를 불러 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1942년 일본의 꼭두각시인 버마 임시정부(1943~1945)의 국방장관 겸 버마군 사령관이 되었고, 1943년 3월 일본 국왕으로부터 ‘훈이등(勳二等) 욱일중수장(旭日中綬章)’을 받았다. 

그러나 뒤늦게 일본의 야심을 알아차린 아웅산은 1944년 8월 다시 영국군과 손을 잡고 일본군과 전투를 하기도 했다.

사가잉 주 몽유와 시 중심가에 있는 아웅산 장군의 기마상. ©조용경
사가잉 주 몽유와 시 중심가에 있는 아웅산 장군의 기마상. ©조용경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자, 버마는 다시 전승국인 영국이 장악했고, 이때부터 아웅산은 버마의 독립을 위해 전력투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1947년 1월 런던에서 영국 총리 애틀리와의 담판을 통해 ‘1년 이내에 버마를 독립시킨다’는 내용의 ‘애틀리-아웅산 협정’을 맺음으로써 미얀마독립을 위한 제1보를 내디뎠다. 당시 영국은 미얀마를 여러 개의 민족국가로 분리독립시키려 했으나 아웅산 중심의 독립 운동가들은 하나의 ‘버마 연방’으로 독립하기를 원했다.

곧 이어 1947년 4월, 미얀마 독립을 위한 총선거에서 아웅산의 '반파쇼국민연합'(AFPFL)이 대승을 거두었으나, 아웅산은 7월 19일 공산당원들에 의해 암살을 당하게 된다.

미얀마는 1948년 1월 4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버마 연방(Union of Burma)’으로 국제 무대의 전면에 등장했고, 아웅산은 미얀마 독립 이후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 받고 있다.

버마 연방의 첫 대통령에는 샨(Shan)족 출신의 사오쉐타익(Sao Shwe Thaik)이, 초대 수상에는 버마 족 출신의 우누(U Nu)가 선임되었다. 아웅산의 랭군 대학 선배이자 독립운동의 동지였던 우누는 1948년부터 1958년까지, 그리고 1960년부터 1962년 3월 네윈(Ne Win) 장군의 쿠데타로 민주정치가 종식될 때까지 집권을 했다. 그는 10년 이상 집권을 했으나 자신이 국방장관으로, 또 한때 수상권한대행으로까지 지명했던 네윈 장군에 의해 축출당했다.

미얀마의 독재자 네윈 장군. 
미얀마의 독재자 네윈 장군. 

 

1911년에 중국계 버마인의 가정에서 태어난 네윈의 본래 이름은 슈마웅(Shu Maung)이었다. 그는 랭군 대학 의과대학에 들어갔으나 2년 만에 퇴학을 당한 후 한동안 직업전선을 떠돌다가 '우리 버마인 연맹'(Dobama Asiayone, 혹은 타킨당)에 가입을 하면서 아웅산, 우누 등과 만나게 된다. 1941년 2월 네윈은 아웅산이 이끄는 ‘30명의 동지들’(Thirty Commrades)의 일원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군사학교를 수료했으며, 그 해 12월 방콕에서 결성된 버마독립군(BIA)의 핵심요원으로 참여했다. 이때 그는 이름을 슈마웅에서 ‘네윈’(Ne Win, 빛나는 태양)으로 개명한다. 그들은 1942년 12월 일본군과 함께 버마로 진군했는데, 네윈은 영국군의 후방에 침투하여 게릴라 전을 펼치는 책임자로 맹활약을 했다.

네윈은 1949년 우누 정부의 국방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내전과 집권당 내분으로 시달리던 우누 수상의 요청으로 1958년 수상권한대행이 되었고, 1960년 봄 수상으로 복귀한 우누에게 권력을 양도했으나, 1962년 3월 쿠데타를 결행하여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네윈 집권하의 버마는 ‘버마식 사회주의’(Burmese Way To Socialism)라는 독자적인 사회주의 정책을 채택했다. 그는 철저한 사회주의를 바탕으로 모든 토지와 기업을 국유화했으며, 거기에 더하여 북한식의 대외적 고립주의와 자급자족경제를 지향했다. 그 결과 경제는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고, 60년대 중반까지 아시아권에서 일본, 필리핀 다음으로 부유한 국가였던 미얀마는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1988년 여름, 오랜 동안 숨죽이고 있던 국민의 불만이 폭발한 ‘8888항쟁’이 터졌고, 마침 어머니의 병구완을 위해 귀국해 있던 아웅산 수치 여사가 군부에 대한 국민적 항쟁의 선두에 서게 된다. 반면 네윈은 자리에서 물러나 권력의 이면으로 사라지게 된다. 젊은 시절 군인으로서, 혹은 독립운동가로서의 네윈이 걸었던 길은 독립운동의 영웅으로 존경 받고 있는 아웅산 장군과 유사하다. 미얀마의 독립운동 과정에서 아웅산 장군과 네윈 장군이 영국과 일본 사이를 오가며 선택했던 행보를 보면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의 식민지 청년 엘리트들의 공통적인 고민을 엿 볼 수 있다.

 

집권 후 아웅산 장군의 묘소를 참배하는 아웅산 수치 여사. ©조용경
집권 후 아웅산 장군의 묘소를 참배하는 아웅산 수치 여사. ©조용경

 

만약 아웅산 장군이 암살 당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미얀마 정치사에 네윈과 같은 인물이 등장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네윈의 쿠데타가 없었다면, 아웅산의 딸인 아웅산 수치 여사가 미얀마의 지도자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참으로 흥미 있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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