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데카메론 이야기’.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데카메론 이야기’.

 

‘코로나19’ 전염을 막기위한 ‘봉쇄’상황에서 고대의 경험이 생각나 책을 펼쳐보았다.

“의사들은 맞는 치료법을 몰랐기 때문에 병을 고칠 수 없었다. 실제 의사들이 환자들과 더 접촉하게 되었기에 사망자들중에 의사들의 사망이 가장 높았다. 다른 어떤 인술이나 어떤 과학의 도움도 사원에서 드리는 기도도 신탁에 묻는 것도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마침내 사람들은 그들이 겪는 고통에 압도당해서 그런 것들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기원전 5세기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집필한 『펠로포네소스 전쟁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스파르타와 아테네 사이의 전쟁 중 아테네에 페스트가 발생했는데 투키디데스 자신도 페스트에 걸린 경험을 갖고 아무런 것도 도움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고통에만 내몰린 ‘무력감’에 대해 쓰고 있다. 2400여년 전 아테네인들을 엄습했을 그 무력감이 실감나는 지금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바이오 테크놀로지와 스페이스 사이언스등, 이제 현란한 기술 사회에 진입했다는데 갑자기 등장한 코로나19의 공격에 인류는 거의 속수무책이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소박하기 그지없는 손씻기와 거리두기이다. 그 간단한 마스크 착용도 마스크 대란으로 맘껏 써볼 수도 없다. 그래서인지 지난3월 27일 비오는 썰렁한 밤, 코로나 종결을 위한 교황의 ‘홀로’ 기도는 그가 서있는 휑하게 빈 성베드로 광장 만큼이나 공허해 보였다.

인류 역사상 동서를 불문하고 위협적인 역병은 반복 되었다. 14세기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쓸어간 페스트는 자주 언급되는데 그로 인한 트라우마는 사회의 근간을 변화시켰다. 중세를 지배하던 기독교적 가치관이 흔들렸다. 이상적 공동체가 부정되는 ‘세상의 종말’을 감지하면서 ‘도덕’ 의지가 무너져 내렸다. 이후에도 속수무책의 역병을 겪게 될 때마다 상황은 비슷했던 것 같다. 독일의 명감독 F.W. 무르나우는 무성영화인 ‘파우스트’(1926)에서 그런 상황을 보여주는 장면을 연출했다. 역병이 오자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집단적 흥분상태로 휘몰리고 패닉상태에서 통제가 안되는 쾌락에 몰입한다. 무르나우가 ‘파우스트’에서 보여줬던 밀물같은 ‘집단적 에너지’의 동요와는 정반대로 침착한 평온으로 역병에 대응하는 영화도 있다. 이탈리아 영화거장 타비아니 형제가 80대가 되어 ‘데카메론’을 바탕으로 만든 ‘경이로운 보카치오’(2015)이다. 그들은 역병에 대응하는 젊은 남녀의 ‘유토피아적 시간’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표현해놓았다.

데카메론은 14세기 이탈리아 토스카나 출신의 작가 G.보카치오가 쓴 고전으로 피렌체 시에 창궐했던 페스트를 피해 아름다운 피에솔라의 별장으로 피난간 젊은 여성 7명과 3명의 젊은 남성이 14일을 함께 보내면서 기도와 가사로 보내는 날을 뺀 10일간 돌아가며 들려주는100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타비아니 형제들 이전에 독보적인 이탈리아 감독 파솔리니는 추종을 불허할 수작인 ‘데카메론’(1971)을 먼저 만들었다. 하지만 타비아니 형제의 ‘경이로운 보카치오’는 파솔리니의 영화와 달리 데카메론에 담긴 이야기들뿐 아니라 어떻게 젊은 남녀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게되었는지 화자들의 시간을 부각시켰다. 14세기 피렌체 시를 파괴한 역병에 대응한 젊은 남녀들의 모습은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이상 새겨볼 의미가 있다.

죽음의 공포를 떠안고 피난간 10명의 젊은 남녀들, 특히 현명하고 활기찬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 14일간의 피난 시간을 알뜰히 조직한다. 각자를 이야기의 화자로 임명해서 그들의 ‘격리’ 시간을, 환상적인 상상력으로 죽음의 공포를 무력화시키고 유토피아적 시간(어른들의 권위도 사회통제도 부재한 자유)으로 만든다. 데카메론의 화자들은 웃고 우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활력을 느끼게하는 육체의 쾌락과 갖은 위선이 폭로되는 해학과 어려움을 극복하는 기치에 환호한다. 노장인 타비아니 형제는 아름다운 젊은 남녀 화자들이 구현하는 ‘낭만적’ 격리를 역병에 굴하지 않고 죽음을 떨치는 용기로 보여주면서 저자인 보카치오의 혜안에 경탄을 표한 것이다. 이 시대에 격리된 우리의 상상력은 보카치오의 상상력에 근접하거나 그를 넘을 수 있을까 ?

세계 곳곳엔 이동제한령이 내려져서 인류 역사에 전례없이 무수한 사람들이 ‘봉쇄’속에 격리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인터넷에 연결되어진 채 암울한 정보의 홍수속에서 전세계의 비극에 노출되어 있다. 14세기의 대역병를 경험했던 보카치오는 세상의 종말을 느낄 만큼 고통스러웠겠지만 코로나 사태를 겪고 있는 우리의 비현실적인 현실도 만만하지 않다. ‘여기 아닌 그 어디라도…’ 천국이든 지옥이든 ‘다른 세상’으로의 탈출을 꿈꾸었던 보들레르가 지금 살고 있다면 닮아가면서 봉쇄와 격리가 벌어지는 세상에서 그의 ‘시’를 포기할 지도 모를 만한 현실이다. 두려운 역병은 미래에도 다르게 회귀할 것이다. 환상적인 상상으로 낭만적인 격리로 죽음의 공포를 차버렸던 보카치오를 ‘창의적’ 모범으로 생각하면서도 우리는 창발적으로 다른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사회불평등과 기후위기를 극복해야 미래에 회귀할 역병을 막아낼 가능성이 높아진다고들 말한다. 그렇다면 코로나 사태 이후의 사회변화를 이뤄낼 수 있는 실천적이고 환상적인 상상의 힘을 나눠야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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