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숙/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choks@ewha.ac.kr

힐러리의 자서전 <살아있는 역사(Living History)> 는 소문만큼이나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이었다. 한 남자교수는 “정치적인 여자가 정치적으로 썼다”며 단칼에 폄훼했지만 내게는 힐러리 내면의 목소리가 매우 진솔하게 다가왔다.

미국 역사를 몇 십 년 앞당기는 데 기여한 한 영부인의 행적이 감동적이기도 했지만 내게는 현재 한국 정치에 주는 교훈에 더 큰 관심이 갔다. 아마도 노무현대통령이 여러 면에서 클린턴 전 대통령과 닮은 면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클린턴은 한 시민으로부터 “흑인을 사랑하는 빨갱이 동성애자”라는 폭언을 듣기도 했다. 대통령에 취임하기 위해 워싱턴 DC 공항에 도착했을 때에는 반대자들의 피켓시위와 마주치기도 했다. 이 책은 정치판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비열한 음모와 흑색선전이 판치는 곳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클린턴의 당선은 민주당 예선에서는 물론이고 본선에서도 예상치 못한 승리였다. 알캔사의 시골뜨기 주지사가 30대 참모들을 이끌고 백악관을 장악하니 워싱턴 정가의 반발이 조직적으로 이어졌다. 선정적인 언론과 공화당 우위의 의회는 임기 초부터 대통령을 흠집내기에 바빴다. 클린턴은 자신도 당선을 예상치 못한 터라 정책의 우선순위나 선택이 전략적이지 못해 좌충우돌하다 2년 뒤 중간선거에서 참패하고 만다.

결국 무혐의로 밝혀졌지만 대통령부부는 화이트워터 의혹으로 수년간 특검을 받기도 했다. 르윈스키 사건은 화이트워터 특검이 낳은 예기치 않은 수확이었다. 이 사건과 관련한 위증으로 탄핵재판까지 받았지만 클린턴은 결국 살아 남았다. 아니 정적들 보란 듯이 성공한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클린턴의 성공비결은 “생활 정치”에 있었다. 그의 정적들이 “여성적 정책”만 다룬다고 클린턴을 비웃을 때 그는 의료보험, 빈곤, 교육, 여성, 아동 문제 등 작은 생활정치를 챙겼다. 힐러리는 이런 쟁점들이야말로 “인간적 정책”이라며 클린턴이 정적의 공격에 아랑곳 않고 “여성적 정책”에 집중하도록 도왔다. 섹스 스캔들로 대망신을 당했음에도 클린턴은 임기 말에 60%가 넘는 지지도를 누리며 레임덕을 걱정하지 않는 대통령이 되었다.

며칠 전 한겨레신문은 노무현대통령의 지지도가 40%라는 여론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그보다 2주 앞서 R&R에 의뢰해서 내가 조사한 결과는 이보다 더 낮다. 철도연대의 파업을 강력하게 해결함으로써 오히려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약간 상승했다고 볼 수 있다.

한 편으로는 제왕적 대통령 운운하며 비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강력한 리더십을 원하는 국민 앞에 노대통령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원래 익숙한 것에 편안함을 느끼는 법이다. 노대통령에 대한 주류의 조직적인 반발이 국민들에게 먹혀드는 이유는 노대통령의 방식이 어색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권위주의를 탈피하려는 노대통령의 모습이 ‘대통령답지 않음’으로 비춰질 수도 있을 것이다.

급기야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는 “노무현씨를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발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노대통령의 말투 하나하나를 문제삼는 보수언론이 최병렬 대표의 예의 없는 발언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킨다. 자신들의 심정을 대변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 정도는 늘 술자리에서 하던 말이라 조금도 어색하지 않기 때문인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나라당은 새특검법 수정안을 민주당의 ‘표결 불참’ 속에 통과시켰다. 수사 대상을 박지원(朴智元)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관련된 150억원에 대한 비리 의혹은 물론이고 대북 송금 전반과 송금액의 북한 핵개발 비용 전용 의혹 등으로 확대했다.

노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한다. 나는 차라리 노대통령이 이 법안에 서명했으면 좋겠다. 노대통령도 동의했듯이 박지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관련된 150억원에 대한 비리는 특검을 통해 진실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대북 송금 전반과 송금액의 북한 핵개발 비용 전용 의혹으로 확대한 한나라당의 특검법이 과연 상식적인 법안인가. 반세기 냉전을 종식하고 모처럼 한반도에 평화의 기운을 가져온 남북정상회담의 성과를 이런 식으로 훼손해도 되는가. 특검은 김정일위원장을 소환조사할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이 상식을 가지고 새특검법안을 통과시켰는지 국민들이 판단할 기회를 갖기 위해 특검법이 그대로 공표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다. 특검이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다면 한나라당은 비현실적인 법안을 통과시킨 데 대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공화당의원들은 클린턴 부부의 화이트워터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특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힐러리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힐러리는 특검을 임명할 만한 혐의가 없는데 정적(政敵)의 요구에 밀려 특검을 받는 것은 법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힐러리의 이런 완강한 태도는 혐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간의 의혹을 부추기는 데 기여했다. 결국 화이트워터 특검은 도입되었고 무혐의로 밝혀졌다. 섹스 스캔들이라는 뜻하지 않은 사태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보면 힐러리는 그 사건으로 인해 독립적인 정치인으로 태어나는 데 큰 도움을 받은 셈이다. 힐러리가 한 여자로서 견디기 어려운 엄청난 시련을 이겨내자 사람들은 그녀에 대한 존경심과 동정심을 갖게 되었다. 그가 미국 최초의 여성대통령감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어쩌면 전화위복일지 모른다.

오늘 나의 제안은 너무도 무기력하다. 거대 야당과 수구언론에 둘러싸인 노대통령의 선택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너무도 잘 알기에. 특검법에 서명하라는 나의 주장이 얼마나 부질없는 소리인지 너무도 잘 알기에. 요즘 같은 때에는 “정말로 정치평론가 못해먹겠다”는 위기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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