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으로 아시아인으로, 차학경이 뉴욕에서 꾸던 꿈

미국 이름 테레사 학경 차(Theresa Hak Kyung Cha)인 이민 1.5세대인 재미 예술가 차학경은 1982년 32살 젊은 나이에 불운하게도 살해당했다. 따라서 그녀가 미술가로 활동한 기간은 8년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녀의 10주기인 1992년 뉴욕의 휘트니 미술관에서 회고전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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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성 미술가들의 활동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대학에서 강의를 한 지 십 년이 넘었다. 지금도 내가 첫 강의 때마다 학생들에게 어김없이 던지는 질문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알고 있는 미술가들의 이름을 묻는 것이다. 첫 시간부터 예상치 않은, 너무 쉬운 질문을 받은 학생들은 잠깐 나의 의도를 파악하느라 머뭇거리다 대답하곤 한다. 그들의 대답은 미술 이론이든 실기 전공이든, 또는 타 전공이든 십 년이 넘도록 거의 한결같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피카소 등 일반인들도 익히 들어봄직한 소위 서양미술의 대가들의 이름이 먼저 나오고, 잭슨 폴락, 앤디 워홀, 알젤름 키퍼 등 유명해진 현대 미술가들이 뒤를 잇는다. 내가 이쯤에서 만족하지 않고 계속 다그치면 몇몇 여학생들의 입에서 종종 나혜석, 루이즈 부르주아, 니키 드 생팔 같은 여성미술가들의 이름이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기도 하지만, 남학생들이 대다수일 때는 이조차 기대하기 어렵다. 그나마 여성미술가들의 이름이 호명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며, 그 수도 열 손가락을 채 넘지 못하는 실정이다. 나는 매년 강의실 안에서 굳건히 유지되고 있는 미술계의 ‘남성 신화’를 재확인하며 실망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내가 강의를 계속해야 할 이유를 발견하고 힘을 얻곤 한다.

그나마 앞서 언급한 부르주아, 생팔 등은 구미 출신의 백인들로서, 여성 미술가에 대한 온갖 편견과 역경을 뚫고 지치지 않는 활동을 한 것이 인정받은 경우이다. 그들에 비해 유색인 여성미술가들은 여전히 성과 인종의 이중적 굴레로 인해 주목을 받지 못하거나, 잊혀진 경우가 허다하다. 여기서 내가 소개하려는 사람은 이제 겨우 망각의 늪에서 벗어나고 있는, 우리에게는 아직도 생소한 한 재미 여성 미술가이다.

유색인 여성미술가란 이중적 굴레

그녀의 한국 이름은 차학경, 미국명은 테레사 학경 차(Theresa Hak Kyung Cha)이다. 내가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1997년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아시아계 여성 미술가들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였다. 그리고 이듬해 버클리 대학교 미술관에서 직접 본 그녀의 작품 몇 점은 내 마음 속에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녀는 내게 지적이며 명석하고 감성적이면서도 절제와 야망을 지닌 인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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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학경을 미술가로 소개하고 있지만, 사실 그녀의 활동 영역은 미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녀는 시인이자 작가, 퍼포먼스와 비디오 미술가, 영화 제작자로서 장르의 틀을 뛰어넘는 다양한 실험을 추구하였다. 미술 영역에서도 손수 만든 책, 메일 아트, 오브제 작업, 필름과 비디오를 결합한 멀티미디어 작업, 슬라이드를 이용한 퍼포먼스 등 한 가지 범주로 부류하기 어려운 전위적인 작업을 계속하였다.

차학경은 1951년 부산에서 태어나 열두 살이던 1963년 가족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소위 이민 1.5세대에 속하는 한국계 미국인이다. 그녀의 부모님은 일본의 식민 통치를 피해 만주에서 성장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 중 한국으로 이주해 왔지만, 이승만 정권의 몰락 이후 몰아친 국내의 정치적 불안과 소요에 휘말리면서 다시 미국 이민을 선택하였다. 그들은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하면서 구한말부터 시작된 긴 유랑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차학경은 이런 성장 과정을 거치며 미 서부에서 미술가로 성장하였고, 1980년 예술활동을 계속하기 위해 뉴욕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러나 1982년 사진작가인 남편의 스튜디오가 있던 건물의 경비원에게 갑작스럽게 살해당함으로써 32세에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하게 된다. 그녀의 사후 계속된 가족의 노력 끝에 1991년 그녀의 모교인 버클리 대학교 미술관 태평양 필름 아카이브에 ‘차학경 아카이브’가 설치되었고, 그 후 그녀의 작품 일체와 기록들은 이곳에 안전하게 보관, 관리되고 있다.

나의 주된 작업은 언어에 관한 것

차학경의 작품을 형성하는 근본적인 요소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으며, 이 둘은 아주 긴밀하게 엮여있다. 그 하나는 이주의 경험인데, 이것은 작품의 정서적 내용의 원천을 이룬다. 미국 이민 직후 그녀는 모국어 대신 영어를 새로 배워야 했고, 영어의 결함을 보충하기 위하여 중, 고등학교 시절에 불어 공부에 더욱 몰두하였다고 한다. 미술가 자신이 ‘나의 주된 작업은 언어에 관한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녀에게 이주 경험에서 나온 언어의 상실과 습득은 중요한 문제였고, 작품에서 언어는 의사소통의 기능을 넘어 그 구조의 탐구로 이어진다.

예컨대, 영어와 불어의 짜집기, 또는 말장난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진 낱말들을 작품 제목이나 작품 내의 텍스트에서 흔히 접할 수 있다. 8분 짜리 흑백 비디오 <입에서 입으로>에서는 한글 모음소와 그것을 발음하는 입의 이미지가 전파 장애로 발생하는 흰 반점과 물소리에 의해 거의 지워지고 들리지 않음으로써, 시간에 따른 언어 상실의 고통이 표현되어 있다.

차학경은 시인이자 작가, 퍼포먼스와 비디오 미술가,

영화제작자로서 장르의 틀을 뛰어넘는 다양한 실험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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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학경의 대표작 <망명자> (1980)의 스틸 사진이다. 17년만에 한국을 방문할 당시 비행기 안에서 찍은 구름 사진으로, 구름은 유랑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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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에 초연한 차학경의 퍼포먼스 작품 <눈먼 목소리>의 한 장면.

1979년 차학경은 17년 만에 한국을 재방문하게 되는데, 귀환의 기쁨도 잠시, 자신이 모국에서 외국인임을 재차 확인하였고, 이듬해 작품 촬영을 위해 남동생과 함께 다시 한국을 찾았을 때는 계엄령 하에서 북한 스파이로 의심받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듯 이민자로서 귀환에 대한 갈망과 그것의 좌절의 경험, 한국과 미국,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틈새에서 만들어지는 또 다른 정체성에 대한 인식은 한국 방문 이후 더욱 확고해져서, 그녀의 대표작 <망명자>(1980)의 주제가 되었다.

차학경의 작품 형성과정에서 중요한 또 다른 요소는 1960년대 말과 70년대에 대두한 전위적 문화운동과 실천으로서, 그녀 작품의 형식적 실험을 위한 중요한 보고가 되었다. 그녀는 1969년부터 십 년 동안 버클리 대학에서 비교문학과 미술 공부를 하며 문학사와 미술학사, 석사 학위를 받았고, 1976년에는 현대영화 이론 공부를 위해 교내 장학금을 받아 프랑스 유학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녀의 재학 당시 샌프란시스코 만 지역은 반전 운동과 인권 운동의 중심지였는데, 그녀는 열렬한 행동주의자라기보다 사색가로서 이런 운동에 직접 참가하는 대신 변화를 향한 비전을 받아들였다. 미술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제작과 유통 구조를 거부하고 완성된 작품보다 개념과 과정에 역점을 두는 퍼포먼스와 비디오, 설치, 대지미술과 같은 새로운 양식들이 출현하였고, 그녀는 이런 변화를 재빨리 감지하여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냈다.

무엇보다 고다르 등의 실험 영화와 프랑스 영화 이론이 큰 영향을 미쳐서 퍼포먼스, 비디오, 영상 작업에 강하게 반영되었다. 식별이 어려울 정도로 미묘한 명암의 변화, 느린 장면 이행, 시간의 점진적인 추이, 현실도 꿈도 아닌 모호한 시간과 공간의 연출이 바로 그런 것이다. 또한 대안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여성 미술가들의 퍼포먼스에 참가하여 그들과 예술적, 지적 교류를 지속하였다.

1992년 뉴욕에서 처음 회고전 열려

사실 차학경이 미술가로 활동한 기간은 8년 정도에 불과하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작품의 수도 많지 않고, 더구나 대부분의 작품이 재학 시절 학위 과정을 위해 창작된 작품이며, 아시아계 미술가들이 무시되던 당시 미술계 관행을 고려할 때, 생존시 그녀가 알려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10주기인 1992년 뉴욕의 휘트니 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과 부대 행사는 처음으로 그녀를 미술가로서 조명하는 소중한 기회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녀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계기는 그녀의 사후 출간된 저서 <딕테> 덕분이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하루아침에 그녀를 무명에서 유명인의 반열에 올려놓지는 않았다. 아시아계 미국인 사회에서조차 <딕테>가 받아들여지는데는 십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

평론가들은 유관순, 작가의 어머니, 성 테레사, 그리스 신화의 여성 뮤즈 등 관계가 없는 듯한 여성 화자들이 등장하는 앞뒤가 맞지 않는 서사와 불문법의 삽입, 사진, 도표, 지도, 여백 등의 몽타주 방법에 혼란스러워 했다. 처음 이 책은 아시아계 미국인 사회가 추구해 온 정체성의 탐구에서 빗나간 가치중립적이며 미적 탐색으로 인식되었고, 그런 이유로 오랫동안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재미학자 일레인 킴은 90년대 이후로 평론가들이 “불확정성, 분열, 그리고 바뀌기 쉬운 복합적인 정체성 사이에서 자유로운 태도를 견지하는 포스트모던적인 개념과 <딕테>의 유사성에 매혹되어 왔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런 이유에 덧붙여, 지난 몇 년간 미국의 미술평론가들은 세계의 중심에서 벌어지는 이중 식민 상태의 여성의 경험을 재현한 그녀의 미술작품이 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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