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경 칼럼] 신사도와 페미니즘
[정진경 칼럼] 신사도와 페미니즘
  • 정진경 사회심리학자
  • 승인 2020.03.13 11:01
  • 수정 2020-03-13 11: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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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어느 젊은 사업가가 아름답고 현명한 한 여성에게 반했다. 열심히 구애를 해서 어느 정도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하루는 만나서 그녀를 한참 칭찬했는데, 그날따라 쌀쌀한 태도를 보이며 대답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평소에 성품이 훌륭하고 변덕도 없던 여성인지라 그는 매우 당황했다.

다음 날 그녀의 기분이 좀 누그러진 것을 보고 용기를 내어 어제의 쌀쌀맞음을 탓했더니, 솔직하게 이유를 말해 주었다. 자기를 칭찬하고 마음 써주는 것은 싫지 않았으나, 바로 전 주문한 목도리를 제시간에 가져오지 못한 젊은 여성을 그가 거친 말투로 꾸짖는 것을 우연히 듣고 마음이 상했다고 했다. 내가 만약 젊고 아름답고 재산도 상당한 여자가 아니고 목도리 파는 그 가난한 여자였다면, 그걸 만들려고 밤새 일했지만 제시간에 가져오지 못했다면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 생각했다고. 당신이 나에게만 경의를 표하지 않고 다른 여성들에게도 부드러운 대접을 했더라면 여성으로서 긍지를 지킬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결혼하기 전에 그녀는 아깝게도 세상을 떠났고, 그는 죽을 때까지 독신으로 지냈다. 평생토록 모든 여성을 차별 없이 대하고 진정한 신사도와 흔치 않은 예의범절을 지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사랑한 여인이 남긴 교훈 덕이 아니었을까.

이 이야기는 1800년대 초반 영국 문필가 찰스 램의 수필선 중 ‘오늘날의 신사도’에 실려있다. 영국이 자랑하는 신사도 사상이란 한낱 판에 박힌 허구에 불과하다고 찰스 램은 비판한다. 한정된 계급이나 나이대에만 적용되는 신사도란 겉치레 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아무도 보지 않고 알려질 리도 없을 때 신사도를 실천한다면 그건 믿을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멋쟁이 신사가 생선장수 여자의 손을 잡아 도랑을 건너 줄 때, 길에 흩어진 과일을 주워 담는 사과장수 아낙을 도와줄 때, 마차 윗 칸에 탄 가난한 여자가 비에 젖는 것을 보고 자기가 아끼는 외투를 그 어깨에 걸쳐 줄 때. 그리고 이 세상 절반 이상의 고되고 천한 일이 여자 손으로 이루어지는데, 그것이 자취를 감추게 될 때.

찰스 램은 위의 현명한 여성의 정당함과 관대함을 높이 칭송하며, 모든 여성이 그렇게 생각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같은 여성의 존엄성이 더럽혀지면 꼭 그만큼 자기 자신의 존엄성도 손상을 입는다고 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이백년 전 살았던 남자의 글이 “세상의 모든 여성이 해방되기 전에는 진정으로 해방된 여성은 없다”는 페미니즘 사상과 통하는 것을 보고 나는 감탄했다. 예수님도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인류의 훌륭한 정신적 업적은 나라와 인종, 종교를 넘어 통한다.

내가 당하는 문제에서 모든 여성의 문제로, 더 나아가 억울하게 인권을 제약 받는 이민, 난민, 장애인, 게이-레즈비언 등 모든 소수자들의 인권문제로 페미니즘의 정신은 확대된다. 그렇지 않다면 진정한 페미니즘이라 할 수 없다. 페미니즘은 모든 사람의 인권을 존중하는 정신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페미니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페미니즘을 내걸고 트랜스젠더를 박해하니, 역시 페미니즘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페미니즘을 욕하고 나섰다. 교통정리가 필요하다. 이건 모두 페미니즘을 몰라서 일어난 일이다. 집단이기주의에서 벗어나 보편적 인권으로, 정의로 나아가야 페미니즘이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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