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만 보고 달려왔던 우리는 예견할 수 없었던 혼자 넘을 수 없는 장벽을 만났다
82년생 김지영보다 못한 삶에 더 서글펐다
​​​​​​​가끔 딸아이들에게 현실의 민낯을 미리 귀띔해야하는지 혼동스럽다

[세 자매가 있는 집에서 자라 세 딸의 엄마가 되어 틈틈이 일하고, 틈틈이 봉사하는 이야기를 매주 함께 합니다. 세 아이들의 이야기를 나누며 딸들이 살아갈 행복한 미래를 그려봅니다.]

 

두 아이를 키우며 일을 병행하던 나는 셋째 아이를 만나며 ‘세딸맘’이 되었다. ©송은아
두 아이를 키우며 일을 병행하던 나는 셋째 아이를 만나며 ‘세딸맘’이 되었다. ©송은아

 

지금의 셋째 아이는 육아독립군으로 두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회사를 오가는 생활 중에 찾아왔다. 남편은 줄곧 네 아이 아니면 더 많이 원했지만 나는 하나만 혹은 많아야 둘이었으면 좋겠다는 정도였다. 둘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다면 딩크도 나쁘지 않다고도 생각했다. 세자매 중 첫째로 자라면서 엄마의 희생을 가까이서 봐왔기 때문이다.

그러던 내가 셋째 아이를 갖게 된 것은 먼저 하늘로 보낸 아이에 대한 상실감과 죄책감 때문이었다. 출근길 아침 첫째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지하철을 타기 전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출산하려면 아직 2개월이 조금 더 남았는데 아이를 낳기 전 일어나는 동일한 간격의 통증이었다. 이상증후인 게 분명해서 출근을 하다말고 바로 병원으로 갔다. 양수에 미세한 구멍이 생겨서 양수가 남아있지 않다면서 바로 입원을 하라고 했다. 담당 의사선생님은 왜 이제 왔냐고 걱정하셨다. 몇 주간을 병원에 누워서 인공적으로 양수를 만들어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국내 최고 인큐베이터 시설을 갖춘 병원에 가서 산부인과와 소아과과 담당 의사선생님들에게 들은 예후는 좋지 않았다. 병상에서 펑펑 우는 내게 그날 처음 본 산부인과 의사선생님은 “엄마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보다 흔한 일”이라며 위로해주었다. 막달까지 회사에서 일하고 첫째를 건강하게 낳았기 때문에 둘째가 이렇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첫째아이와 연년생이 될 뻔한 둘째아이는 출산을 3개월 남기고 병원 입원해서 1개월간을 보낸 후, 완벽히 포기해야했다. 육아·회사에서의 애매한 위치, 시댁과의 갈등으로 인해 많이 힘들 때 아이는 하늘로 돌아갔다. 엄마의 삶 속에 끼어들 틈이 없다는 걸 아이가 직감한 듯하다. 그때 그 아이에게 약속했다. ‘하늘에서 보고 있다가 와도 된다고 생각이 들 때 언제든 엄마에게 오라’고. 먼저 떠난 아이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거리낌 없이 지금의 둘째, 셋째를 만나게 된 것이다. 막내 아이가 생겼을 때 더 이상 무리를 하면 안 될 것 같아 회사를 그만두었다.

동생이 사랑스러운 언니. ©송은아
동생이 사랑스러운 언니. ©송은아

 

그때 왜 아이를 먼저 떠나보낼 만큼의 스트레스를 감내했을까? 아이를 낳았지만 그 전과 다르지 않게 일하고 싶었다. 내가 속한 업계에선 퇴근시간이 늦고 밤을 새우는 일도 종종 있어 결혼한 여자들이 재직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결혼해서 아이 낳고 계속 회사를 다니는 사람은 창사 이래 내가 처음이었다. 십년 전 이야기지만 여성 직원의 출산 및 육아휴직에 대한 복지가 처음 생긴 것이다. 같은 팀 동료들이 나를 많이 도와주었기에 고마움도 있었고, 회사에 선례를 남긴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다. 육아를 하면서도 일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이고 싶어서 첫째를 가졌을 때보다 부지런을 떨었다. 여성 후배들에게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도 일 할 수 있다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고, 딸의 엄마로서 여성이 일하는 사회로 한 발 더 발전시켜야 한다는 막연한 책임감도 있었다. 유리천장을 조금이라도 낮추려고 각자의 자리에서 각개전투 벌인 십 년 동안 변화가 있는 것일까?

두 딸의 친구 엄마이자 세 딸을 가진 이웃과 종종 만난다. 세 딸을 가진 것뿐만 아니라 세 자매 중 첫째라는 공통점을 가진 우리들의 이야기는 우리 딸들이 미래에 마주 칠 벽에 대한 걱정으로 향한다. 딸들만 있었던 집에서 자란 우리들의 부모님들은 남자나 여자나 평등하다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항상 이야기하셨다. 그래서 우리들이 체감한 박탈감은 더 크게 다가왔었다. 앞만 보고 달려왔던 우리는 예견할 수 없었던 혼자 넘을 수 없는 장벽을 만났다. 82년생 김지영보다 못한 삶에 더 서글펐다. 가끔 딸아이들에게 현실의 민낯을 미리 귀띔해야하는지 혼동스럽다.

얼마 전 딸아이에게 한국 최초의 밀라노 패션 유학생으로 디자이너로 활동하시면서 유럽 명품 브랜드들을 한국에 론칭한 60대 여성분의 일대기 영상을 보여준 적이 있다. 짧은 영상을 보고 난 딸은 “이 분 결혼했어?”라는 질문을 했다. 패션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열 살 딸은 벌써 무언가 직감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일하며 멋지게 혼자살고 있는 비혼인 내 친구들을 너무 많이 만나서일까? 솔직히 좀 놀랐다. “저 분은 남편도 있고, 두 아들도 있대, 결혼하고 아이 낳는다고 다 포기해야 하는 건 아니야”라고 말해줬지만 벌써 현실에 눈뜬 것 같아 안쓰럽기도 하고, 네가 나보다 낫다 싶기도 하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송은아 혜윰뜰 작은 도서관 관장·프리랜서 브랜드컨설턴트
송은아 혜윰뜰 작은 도서관 관장·프리랜서 브랜드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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