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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존 레논과 결혼한 오노 요코는 신혼여행 간 호텔로 기자들을 불렀다. 둘의 섹스 장면을 기대하고 간 기자들이 발견한 것은 <평화를 위한 침대 시위> 퍼포먼스였다. 그 사진 앞에 선 오노 요코. <사진·민원기 기자>

“10대 시절 나는 거듭 동맥을 자르거나 약을 먹으려 했다. 훗날 세 남자가 나의 예술 활동을 지원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늘 좌절한 예술가였다. 나는 내 작품이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느낌에 시달렸다.”

한 인터뷰에서 오노 요코는 과거를 이렇게 회상했다. 실제 존 레논이 ‘가장 유명한 무명 예술가’라고 말했지만, 오노는 존 레논을 만나기 전부터 예술가였다. 플럭서스 운동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존 레논을 만난 후 오노는 미시즈 레논이 돼버렸다.

급진적인 페미니스트들을 인터뷰한 다큐멘터리 <그녀들만의 것>속에서 인터뷰어는 오노에게 묻는다. “‘onoed’란 말을 아느냐?” 오노는 고개를 젓는다. 우리말로 치면 ‘오노스럽다’쯤으로 해석되는 이 말 뜻은 이렇다. 희생자가 되다.

존 레논은 살아서 이렇게 외쳤다. “태어났노라, 살았노라, 오노를 만났노라.” 하지만 끊임없이 전시를 하고 퍼포먼스를 하고, 전위예술의 세계를 걸었던 오노는 그 당시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했다. 팝스타 존 레논의 아내였고, 아니면 ‘해프닝의 여사제’였고, 아니면 비틀즈를 해체한 주범이었다. 또 하나의 팜므파탈로 여겨졌던 오노 요코가 6월20일 처음 한국에 왔다. 예술가 인생 40여 년을 회고하는 전시회 <오노 요코 YES YOKO ONO>(로댕갤러리, 9월14일까지)를 돌아보기 위해서였다. 아시아 순회전의 첫 번째 도시였다. 얼마나 시달렸는지, 오노는 기자들에게 미리 못을 박았다. 작품 세계를 제외한 사생활에 대해선 일절 질문하지 말 것. 질문할 시 퇴장하겠음.

<인형의 집> 노라가 바로 나다

요코는 1933년 부유한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족할 것 하나 없었다. 겉으로 보기엔. 원래 음악가가 꿈이었으나 가업을 이어받아야 했던 아버지는 오노가 피아니스트가 되길 바랐다. 또 아버지는 항상 큰딸에게 말했다. 넌 특별한 사람이 돼야 해. 그러나 2차 대전이 터지고, 일본의 모든 가정이 어려움에 빠졌다. 오노 집안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골로 피란을 갔다. 거기선 굶주림과 공포가 기다리고 있었다. 훗날 오노가 반전 운동가, 평화주의자가 되는 건 당연했다. 오노는 아버지의 바람과 타협지점을 찾아 성악과 작곡을 공부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철학으로 방향을 틀었으나, 역시 아니었다. 그때 마침 변화가 일었다. 오노가 스무 살 때 온 집안이 뉴욕으로 이주했다. 아버지 때문이었다.

하버드대 여름 음악학교에 들어간 오노는 거기서 자유를 만났다. 전혀 다른 세계였다. 전위예술 서클에서 오노는 첫 남편을 만났다. 전위 음악을 공부하던 학생이었다. 집안과 의절하면서까지 결혼을 감행한 오노는 뉴욕에서 전위예술로 깊이 빠져들었다. 그러나 의욕과 달리 현실은 풀리지 않았다. 1950년대 당시는 남성의 시대였다. 해프닝이 주를 이룬 플럭서스 운동을 주도한 것도 남성들이었다. 여성들이 부엌대기이던 시대, 급진적인 예술을 펼치는 일본 여성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비평가들은 혹평했다. 오노의 의욕은 넘쳤으나, 현실은 참담했다. 오노는 우울증에 시달리다 정신 병원에 입원했다. 일본에 돌아온 뒤였다.

‘마녀’에서 예술가로 새롭게 평가받는 오노 요코

9월 14일까지 회고전 열려

남편과 결혼 생활은 오래 전에 파탄이 나 있었다. 오노를 정신병원에서 꺼내준 건 두 번째 남편이었다. 앤서니 콕스는 화가이자 영화 제작자이자 음악가였다. 그리고 1963년 오노는 딸 교코를 낳았다. 그러나 파탄의 전주곡이었다. 일본에서 오노는 행복하지 않았다. 자유로운 뉴욕이 그리웠다. 그러나 콕스는 일본 생활을 만족스러워 했다. 또 오노가 전통적인 여성 역할을 해주길 기대했다. 아이를 보고 밥을 하고 가정을 돌보고. 오노는 훗날 이 시기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입센의 <인형의 집>에 나오는)노라는 독립을 위해 남편과 자식을 버렸지요. 노라는 내게 초기 페미니즘적 태도를 상징합니다.” 오노는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966년 런던에서 존 레논을 만났다. 인디카 갤러리에서 열린 자신의 전시회장에서였다.

이 세계는 하나다

6.20.11:00.am.

한국에 온 오노는 사람들과의 자리에 두 번 나타났다. 전시회 오프닝 바로 전 날 ‘프레스 프리뷰’로 한 번, 그리고 첫날 ‘작가와의 대화’로 한 번. 주요 일간지 위주로 엄격하게 제한한 기자 회견장에서 오노는 엄격했다. 단호했고, 할 말만 딱하고 입을 다물었다.

“마음 열고 같은 심장박동을 느끼면 우린 하나다. 아시아도 하나다. 세계 지구촌 시민으로서 우린 하나다. We are the world. 여러분 모두를 사랑합니다. We are all together.” 이렇게 말머리를 시작한 오노는 상징처럼 돼버린 긴 머리 대신, 짧은 커트였다. 동그란 선글라스를 코 끝에 걸쳐 쓴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람들을 쳐다봤다. 칠십이라는 나이가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파워풀한 눈빛이었다. “존 레논과 함께 만든 곡으로 댄스버전을 만들고 있는 걸로 안다. 이유가 있나?”는 질문에 오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사실 내 노래다.”

그 후 오노는 평화를 말했다. 자신은 일관되게 평화를 말한다며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오노의 전시작 에 얽힌 이야기였다. 지도가 한 장 전시돼 있고 지시문은 간단했다. 자기가 평화를 원하는 나라에 스탬프를 찍어라. 그러자 한 사람이 오래도록 자기 나라를 찾고 있는 걸 보았다. 그의 나라는 사라예보였다. 지도상에서 사라진 나라. 오노는 가슴이 아팠다며 특유의 약간 떠듬거리는 톤으로 말했다.

“언젠가 우리 모두가, 세계가 서로 존중하고 살아가길 희망한다. 이런 끔찍한 일이 자행되는 일이 없길 바란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하나다. 한 민족이다. 세계 여성에게 고통을 가하면 자기도 모르게 우리 모두 고통을 겪게 된다.”

나는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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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기 Cut Piece, 1965

6.21.토. 오노 요코와의 대화.

다음날 관객들과 만나는 <오노 요코와의 대화>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400석 좌석은 일찍이 꽉 찼고 서서 들으려는 사람들도 넘쳤다. 외국인들을 발견하기도 어렵지 않았다. 이날 나타난 오노는 전날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딱딱하고 찬바람 쌩쌩 불고 할 말만 딱딱하던 오노 요코가 아니었다. 홍보팀은 시종일관 신신당부를 잊지 않았다.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리지 말아주세요. 작가가 퍼포먼스를 할 예정입니다. 플래시가 터지면 퇴장당하거나 작가가 퇴장해버릴지 모릅니다. 염려와 달리 나타난 오노는 여유로웠다.

“여러분이 여기 한 자리에 모인 건 기적이라 생각한다. 여러분은 이 자리에 왔다. 전 세계가 어려운 시점에 있지만, 건강한 마음과 몸으로 함께 하고 심장박동을 함께 하는 건 기적이다.”

이렇게 말문을 연 오노는 문득 주위를 휘휘 둘러봤다. “내가 편안한 지역을 설정할 수 있는지 찾아보겠다.” 오노는 대뜸 무대 한 가운데 놓인 의자로 걸어갔다. 의자 속으로 들어가 누웠다. 의자를 눕혔다 세웠다. 온갖 포즈를 의자와 연출하던 오노 오노는 의자를 본래대로 세운 뒤, 보통 자세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게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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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첫 투어로, 도쿄보다 서울에서 먼저 전시를 연 느낌을 말해 달라”고 하자 오노 오노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뱃속에서 우러나는 소리를 내질렀다. “아…아…아아아아 아…”대답이었다.” 오노는 한시도 가만히 있질 않았다. 계속 무대를 서성였다. 앉으란 권유에 오노는 거절했다. “아뇨. 이대로 좋습니다.” “음악을 틀까요?” “아뇨. 어차피 음악은 제 마음 속으로 돌리고 있어요. 여러분이 노래하는 것도 다 사랑을 전달하는 방법이에요. 북한에도 그런 노래를 전달하면 좋겠어요. 항상 노래로 전달하면 좋겠어요. 사랑의 노래로.”

오노 요코는 계속 왔다 갔다 하며 말했다. 현대 미술과 동양적 감수성을 어떻게 결합시켰느냐는 질문에 오노가 또 소릴 질렀다. “우와. 아하. 아하. 아하.” 저 뱃속 깊은 곳에서 끌어올려 나오는 힘찬 소리였다. “어떻게 답할지 모르겠어요. 이렇게 소리로밖에. 어떤 공식적인 방법을 못 찾겠어요. 이런 음, 사운드를 통해 커뮤니케이션 할 수밖에 없어요.”존과 어떻게 만났냐는 물음에, 오노는 백 번도 더했을 듯한 이야기를 했다. 존 레논이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런던 인디카 갤러리 오노의 전시회에서였다. 오프닝전에 나타난 존이 오노의 <못 박기 회화>를 보고 못을 박겠다고 말했다. 오노가 돈을 주면 박아도 좋다고 말하자 존이 말했다. “상상의 못을 박고, 상상의 5실링을 드리면 되겠네요.” 그때 오노는 생각했다. ‘이 사람 머리가 참 빠른 사람이구나.’

이 이야기에 관객들은 웃음이 터졌고, 오노의 말이 끝나자 박수가 터졌다. 존이 죽은 지 23년이 지났지만, 오노는 아직도 미시즈 레논이었다. 오노는 과거 자신의 위치를 설명했다.

“동서양 어디서든 난 항상 이방인 위치였다. 서양에선 더 상대적으로 환영받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니 비슷하지만. 인종보다 성차별이 더 심했다. 이중차별이었다. 많은 여성 아티스트들이 그래서 더 고독했다. 낭만적인 아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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