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책임프로듀서
“봉준호의 봉두난발, 연출 다 좋아...
오스카 4관왕은 한국 관객 덕분”

스필버그 등 할리우드 인맥 탄탄
2009년 마더 때부터 봉준호 인연

이미경 CJ그룹 부회장.  CJ그룹 제공
이미경 CJ그룹 부회장. CJ그룹 제공

 

“감사합니다. 나는 봉준호의 모든 것을 좋아합니다. 그의 봉두난발, 유머 감각, 그리고 무엇보다 연출을 좋아합니다.” “그동안 묵묵히 지원해준 남동생, 영화를 보러 가 준 관객들에게도 감사합니다. 주저하지 않고 저희에게 의견을 바로바로 말씀해주셨고, 그런 의견 덕에 계속해서 감독과 창작자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영화 ‘기생충’이 한국영화 최초로, 그리고 외국어로 만든 영화로는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 영화상 작품상을 품에 안던 순간, 한 여성의 유쾌한 수상소감이 시상식장인 LA 돌비극장 안에 울려 퍼졌다. 한국식 액센트가 분명하지만, 유머 감각과 자연스러운 표현이 뛰어난 유려한 영어로 역사적인 순간을 기록한 사람은 이미경(62) CJ 부회장. 시상식을 TV로 지켜본 많은 사람들에게는 ‘낯선’ 얼굴이었지만, 지난 20여 년간 한국영화와 대중문화 산업이 세계 시장으로 진출하는 데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다. 미키(Miki)라는 애칭으로 할리우드에서도 이름난 그는 아카데미 영화상을 주관하는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 회원이기도 하다.

이 부회장의 감사의 말 가운데 특히 주목할 부분은 남동생에 대한 감사. 남동생은 CJ 이재현 회장을 지칭한 것으로, 지난 박근혜 정부 때 CJ가 만든 영화와 TV 프로그램들과 관련 영화인들이 ‘블랙리스트’에 오르고, 이 부회장이 사퇴 압력을 받았던 일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실제로 2016년 12월 6일 열린 국회 청문회에서 이미경 부회장의 외삼촌 손경식 CJ 회장이 “청와대 경제수석이 대통령의 뜻이라며 이미경 부회장이 물러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고 증언했다.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이 9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이 작품상을 수상한 후 소감을 밝히고 있다. CJ는 자회사인 CJ ENM을 통해 ‘기생충’을 투자·제작했다. ©로스앤젤레스=AP/뉴시스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이 9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이 작품상을 수상한 후 소감을 밝히고 있다. CJ는 자회사인 CJ ENM을 통해 ‘기생충’을 투자·제작했다. ©로스앤젤레스=AP/뉴시스

 

이미경 부회장은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의 맏손녀. 경기여고와 서울대 가정관리학과를 졸업한 뒤 하버드대학에서 동아시아지역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고 “대륙을 호흡하고 싶어” 90년부터 91년까지 상해의 복단대학 대학원에서 박사과정(현대한어 전공)을 이수했다. 덕분에 영어-중국어에 모두 능통하다. 그는 삼성가의 혈통이라는 것보다 CJ E&M을 글로벌 대중문화 콘텐츠 회사로 키운 경영인으로 더 뚜렷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를 투자·배급했고, CGV를 통해 한국의 극장 관객 2억 명 중 절반인 1억 명을 끌어모았다.

이 부회장은 일찌감치 대중문화산업에 주목했다. 삼성전자 아메리카의 이사로 있던 이 부회장은 1994년 당시 할리우드 최고의 영화감독이자 제작자였던 스티븐 스필버그와 애니메이션 제작자 제프리 카첸버그, 데이비드 게펀이 영화 제작 및 배급사 드림웍스 설립에 참여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고 바로 응했다. 당시는 삼성 계열사이던 제일제당이 드림웍스 자본금 30%에 해당하는 3억 달러를 투자하도록 이끌었다. 제일제당은 드림웍스 영화의 아시아 배급권(일본 제외)을 얻었고, 1996년 CJ그룹이 설립된 후 CJ E&M이 세계 수준의 종합 엔터테인먼트 회사로 성장하는 씨앗이 되었다.

봉준호 감독과의 인연은 2009년 영화 ‘마더’에서 시작되었다. ‘마더’는 관객이 300만명 이하에 머물었지만, 이부회장은 봉감독 특유의 문제의식과 독특한 표현력에 주목했다. 그해 ‘마더’가 칸 국제영화제 주목할만한시선 부문에 초청받자, 이 부회장은 칸 국제영화제 현장에 직접 날아가 자신의 인맥을 통해 공격적인 홍보 활동을 펼쳤다.

이미경 부회장은 2000~2010년대 내내 국내 엔터테인먼트 전문지가 선정하는 ‘영향력 있는 인물 1위’를 지켰다. 대중 앞에 나서는 활동은 많지 않지만, 대중문화 산업에서 그가 차지하는 영향력은 최고 수준이다. 그를 가까이에서 접한 사람들은 이 부회장의 인물 보는 눈이 매우 뛰어나다고 말한다. ‘미치광이’로 보일 만큼 개성이 뚜렷한 인물들을 좋아하고 이들을 키운다는 것이다. 그 자신이 먼저 개성이 분명하다. 검은색 아이라이너로 눈매를 강렬하게 표현하고 머리카락을 올려 키를 커 보이게 한다. 이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그만의 시그너처가 두드러졌다. ‘샤르코-마리-투스’라는 유전성 신경질환을 앓고 있는 그는 수년 전 ‘블룸버그 마켓츠’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고통스러울 때마다 명상을 통해 마음을 다잡았다. 시련이 주어진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마음을 비우니 분노가 가라앉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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