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한 명이 30~40명의 실험을 세심하게 챙길 수 없다. 과학교육의 환경개선이 시급하다.
초등학교 과학실험 최저 수준 유지
전담교사제로 교육환경·질 높여야
아이가 신학기 책을 가져온 것을 보니 7차 교육과정이 다르긴 다른가 싶었다. 사회는 ‘사회와 우리고장의 생활’, 과학은 ‘과학과 실험·관찰’로 교과서가 각각 두 권씩이었다.
실험·관찰 책을 보니 ‘이 실험만 제대로 해주면 과학 기초는 잡히겠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괜찮아 보였다. 같은 학부모인 후배를 만나 변한 교과서 얘기를 하면서 별도로 ‘00과학나라’같이 집에 와서 실험해주는 사교육 과학은 할 필요가 없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런데 그 후배 왈 “언니 나랑 내기할래. 글쎄 실험 한 1/3 하면 잘 할 걸”.
이제 방학을 한 달 앞두고 있는 아이에게 실험을 얼마나 했나 물어보니, 아직도 한참 많이 남아 있다고 했다. 놀러온 4학년 형한테, 실험을 얼마나 했나 물어보니 거의 다 해간다고 했다. 차이는 과학실험 보조원이 붙는 것과 붙지 않는 데서 연유하는 듯하다.
4학년의 경우 실험 도구를 다 자리에 놓아주고 치워주는 보조원이 있는 반면에 3학년은 예산상 보조원이 할당되지 못했다.
3학년이 실험도구를 처음 다루는 학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3학년에 보조원이 할당되지 못하는 것은 교육적으로 심각한 문제이다. 경험적으로 그리고 관찰자로서도, 대체로 첫 경험은 원형적 경험이 되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러므로 처음에 실험을 편안하게 접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이후 아이의 과학에 대한 선호도는 달라질 것이라고 보인다.
결국 3학년은 몇 번의 서툰 실험으로 1학기를 끝낼 듯 싶다.
과학입국 대한민국의
‘최저 수준’과학실험 보조원
그런데 과학실험 보조원은 일용직이고 대체로 여성이다. 전국여성노동조합과 (사)한국여성노동자협의회가 올해 4월 조사한 바에 따르면, 보조원은 월 평균 69만1600원을 받고 연봉으로 치면 830만원을 받는다.
방학에는 당연히 급여가 없고 정규직이 받는 각종 휴가·복리후생제도의 적용을 받고 있지 못하다. 이러다 보니, 보조원은 이곳을 실업 중 혹은 혼인 전 잠시 머무는 곳으로 생각하지 직장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보조원은 오래 붙어 있는 사람이 없다”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교사 혼자서는 도저히 실험도구 나눠주고 뒤처리를 감당할 수 없어서 실험을 가능하게 하는 ‘최저 수준’의 방법으로 보조원 제도가 도입된 듯 싶다. 이때 ‘최저 수준’이란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제까지 우리 사회에서 국가가 주도하는 보육이나 교육 정책의 지표는 ‘최고 수준’이 아니라 바로 이 ‘최저 수준’이었다.
OECD 가입국이 되기 전까지 이 기준은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OECD 가입국이 된 지금까지도 ‘자주 국방’ 등등의 이유로 우리는 가장 빈국 수준의 이 정책 기준을 참아내야 하는 걸까?
아르바이트 일손들이 하면 딱 좋을 수준의 일용직 보조원 일에 제 정신을 가진 대졸자들이 붙어 있다면 그게 정상일까? 35∼40명의 실험에 실험 진행자 1명, 준비하고 치우는 보조원 1명의 이 실험 구도를 ‘과학교과 전담교사제를 도입해 과학·실험은 교사 1명 당 10명이 한다’라는 고급스런 과학교육 구도로 바꿔보자는 발상의 전환은 불가능할까? 교사 1명이 감당할 수 있는 실험의 수준이 어떨지 빤한 거 아닌가? 사교육에 과학 실험을 의존하는 엄마들은 팀을 2, 3명 이상 넘지 않게 짠다.
이 수를 넘으면 제대로 실험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모들의 현실적 기대치를 어느 정도 따라가려는 시늉이라도 해야 공교육에 기대해볼까라는 생각도 드는 게 아닌가?
‘고급’ 교육이 정책기준 되길
시민단체에서 하는 과학 캠프에서는 팀당 인원은 10명 정도고 교사 1명에 자원활동가 보조원이 한두 명 정도 붙는다. 이것이 교사들이 제대로 실험 가능하다고 제시하는 기준이다. 자연 탐사와 같은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지금의 학교 구조에서 자연탐사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나는 전교조나 교총 모두, 7차교육과정이 다뤄야 할 양은 많아지고 시간은 줄어들었다는 불평만 하는 것이 잘 이해가 안 된다. 모든 과목에서 이런 불평이 터져나오고 있다. 그럼 모든 과목의 시간을 늘려줄 수는 없지 않은가? 아이들은 지금도 소화불량인데. 아이들의 소화량을 감안해 교과 양을 교육적 적정 수준으로 조정하고 교육내용은 대폭 개편하면서 좀 알차게 실험하는 효율적인 교육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교육 양을 줄이자는 주장은 본 적이 없다.
이는 지금 교실구조에서는 교사 퇴출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알찬 수업이 가능한 규모로 교과 전담제가 되면, 과학·사회·가정… 과목 수는 줄어도 교사가 퇴출당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중·고등학교에서 교사가 남으면 초등학교로의 호환도 생각해볼 수 있다.
‘자주 국방’을 위해 국방비를 늘려야 한다는 정책에 “무슨 소리냐, 국가경쟁력을 제고하려면 교과전담제를 늦출 수 없다. 그 돈 있으면 실험실을 더 짓거나 학급 당 학생 수를 줄여라”라는 반대적 정책 주장, 그리고 끈질긴 정책화 시도를 두개의 거대 공룡화된 교사 집단에게 기대해보는 것은 무리일까? 설사 보조교사를 쓴다고 해도 월 급여를 현실화해 과학교사와 비등한 교사 몫을 해내게 하는 게 과학입국의 백년지대계가 아닌가?
싼 임금이 경쟁력이던 시절은 지나갔다. 영어 부품만 읽을 줄 아는 학생들을 대량 길러내던 학교로 이 탈근대 정보화 사회를 개인이건 국가건 살아낼 수 없다는 건 정책 엘리트들이 더 잘 알지 않을까? 그런데 모르는 것 같다.
정보화 사회는 상투적 의미가 아닌 그 본래 의미에서의 고급인간을 요구한다. 그 고급인간은 고급스런 교육 환경 속에서 길러질 수 있다. 이제는 ‘고급’이 정책 기준이 되어야 할 때인 듯 싶다.
김정희/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