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28일 별세
전시 성폭력 피해 여성 지원
재일동포 교육 지원에도 힘써
생애 마지막까지 일본군‘위안부’ 포기 말라 당부

영화 '김복동'의 김복동 할머니. ⓒ엣나인필름
영화 '김복동'의 김복동 할머니. ⓒ엣나인필름

 

1월 28일은 여성인권운동가 고 김복동 할머니 1주기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여성인권운동가였던 김복동 할머니는 “일본 정부에 고한다, 이 늙은이들이 다 죽기 전에 하루빨리 사죄하라!” 외쳤다. 일본이 전쟁범죄를 외면하는 가운데 지난 23일 또 다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한 명이 숨을 거뒀다. 남은 생존자는 19명이다. 

김복동 할머니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전쟁범죄와 치열하게 싸웠다. 일본을 향해 전쟁범죄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고 또 다른 전시 성폭력을 겪은 각국 피해여성들과 연대했다. 

그는 1926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나 1940년 만 14세 나이로 일본군 ‘위안소’로 강제동원됐다. 고향으로 돌아온 때는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지 8년째 되던 1948년이었다. 1992년 3월 피해 사실을 공식 신고한 후 한국정신대대책문제협의회에 투신했다. 다음해, 김씨는 유엔인권위원회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 처음으로 파견돼 피해사실을 증언했다. 그는 일본의 전쟁범죄를 알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김 할머니는 언제나 당당했다. 폭언을 하는 일본 노다 총리와 하시모토 오사카 시장을 향해 “직접 겪은 당사자가 증거다. 증거가 왔으니 내 이야기를 들어라” 일갈했다. 

2012년 김복동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 문제를 넘어서 세계 각국에서 전시 성폭력으로 고통 받는 여성들을 돕는 데에 나섰다. 또 다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길원옥 할머니와 함께 일본 정부로부터 법적 배상을 받으면 전시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위해 전액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에 따라 정의기억연대의 전신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함께 나비 기금을 설립했다. 정의연은 나비 기금으로 우간다, 콩고민주공화국, 베트남, 코소보, 이라크 등 세계 무력분쟁지역 성폭력 생존자들을 지원한다.

다큐멘터리 '김복동'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다큐멘터리 '김복동'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김복동 할머니의 행보는 일본 재일교포들에게도 향했다. 재일조선학교에 대한 일본의 차별정책을 듣고 이들을 돕기 위해 노력했다. 김 할머니의 유지 중 하나는 재일 조선학교에 대한 지원을 계속해달라는 것이었다. 재일 조선학교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2014년 5000만원을 기부했고, 2018년 9월 재일 조선학교에 성금을 전달하기 위해 길원옥 할머니와 일본 오사카를 방문했다. 같은 해 11월 ‘김복동의 희망’을 통해 5000만원을 추가로 기부했다. 김복동의 희망은 재일 조선학교를 지원하고 김복동 장학금을 지원하는 단체다. 그는 2019년 바른의인상을 수상하면서 받은 상금 500만원도 김복동의 희망에 후원했다. 

한·일 외교장관회담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발표된 ‘위안부’ 피해 구제 합의로 화해·치유재단이 발족한 후 김복동 할머니는 해산을 위해 노력했다. 2018년 9월, 수술을 받은지 5일만에 병상에서 일어나 빗속에서 1인 시위에 나섰다. 4개월 후, 김복동 할머니는 숨을 거뒀다. 

국경없는기자회는 김복동 할머니를 ‘자유를 위해 싸우는 세계 100인의 영웅’에 선정했다. 넬슨 만델라, 마틴 루서 킹, 달라이 라마 등과 이름을 나란히 했다. 2019년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 기념 제35회 한국여성대회에서 김복동 할머니는 여성운동상을 받았다.

김복동 할머니가 투쟁한 역사는 다큐멘터리 영화 ‘김복동’에 담겼다. 영화 ‘김복동’은 작년 8월 개봉해 약 9만명의 관객을 모았다. 정시우 영화칼럼니스트는 영화 ‘김복동’에 대해 “존재 자체가 증거이고, 삶 자체가 우리의 역사이고, 이름 자체가 상징이 된 김복동”이라고 평가했다. 

윤 이사장은 김복동 할머니의 임종 직후 할머니가 남긴 이야기를 전했다. 김복동 할머니는 “위안부 문제를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며 일본에 대한 강한 분노를 욕으로 표현했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랐다.

윤 이사장은 전화 인터뷰를 통해 “살아남은 자로서 가해자들의 반성과 사죄, 배상을 받아내고 나아가 이 땅에 다시 이러한 피해가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김복동 할머니께서도 우리가 ‘김복동’이 돼 목소리를 내며 살기를 바라실 것”이라고 덧붙였다.

 

2017년 ‘1300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 참석한 김복동 할머니. ⓒ여성신문 사진기자
2017년 ‘1300차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 참석한 김복동 할머니. ⓒ여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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