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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 정부의 보수정치가 지배하던 80년대에는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반격이 은근슬쩍 거세지던 시기이기도 하다. 남녀평등이라는 대의명분을 정면으로 공격할 수는 없으므로 여성운동에 대한 폄하는 좀더 세련된 논리를 필요로 했다. 이름하여 여성들이 독립적이 되고, 사회생활에서 성공과 평등을 성취했을지는 몰라도 개인적인 삶에서는 훨씬 비참해졌다는 것. 즉 사회적인 성공을 이룬 여성들이 진정한 사랑을 나눌 남자를 만나는 것이 어려워졌고, 자녀를 낳지 않거나 낳을 수가 없는 형편이어서 훨씬 외롭게 살게 된 것이 폐단으로 지적됐다. 사랑과 일 두 가지를 다 성취할 수는 없다는 논리가 깔려있다.

요즘 미국에서 상영 중인 영화 <사랑 타도! (원제 Down With Love)>는 어떻게 보면 이런 논리의 연장선상에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완 맥그리거와 르네 젤위거 두 톱스타가 주연한 이 영화는 1962년이 시대배경. 60년대라면 미국에서 인종차별반대 등 인권운동이 본격적으로 태동되던 시기로 페미니즘의 물결도 예외일 순 없었다.

영화는 페미니스트들의 선언문 같은 저서를 내 일약 베스트셀러 저자가 된 한 여성과 바람둥이 남자 기자간의 다툼이 결국 사랑으로 변하게 된다는 아주 정통적인 로맨틱 코미디. 영화는 1960년대에 인기 높았던 록 허드슨-도리스 데이 콤비의 섹스코미디를 노골적으로 패러디한다. 이완 맥그리거는 록 허드슨을(록 허드슨보다는 게리 그랜트를 더 연상시키지만), 르네 젤위거는 도리스 데이를 재창조해내려 애쓴다. 특히 <필로 토크 Pillow Talk>를 연상시키는 장면들이 많다.

르네 젤위거가 연기한 바바라 노박은 지방 도시에서 뉴욕의 맨해튼으로 갓 올라온 젊은 여성. 페미니스트 행동강령서와도 같은 책 <사랑 타도!>의 출판에 맞춰 뉴욕의 출판사에 왔고, 같은 또래 여성인 편집자는 홍보를 위해 남성잡지 <노우 Know>와 인터뷰 약속을 받아낸다. 이완 맥그리거가 맡은 캐처 블록 기자가 그 일을 맡았지만 그는 페미니스트=못생긴 노처녀란 고정관념이 있어 번번이 인터뷰 약속을 깨트린다. 미녀 스튜어디스 친구들과 노는 게 훨씬 즐거운 바람둥이인 탓이다.

캐처의 도움 없이도 책은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된다. 여성들이 자아를 찾기 위해선 남성들에게 종속시키는 사랑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바바라 노박의 주장. 그래서 사랑도 남자들처럼 캐주얼하게 즐기는 쪽으로 바꾸라고 충고한다. 직장에서의 종속을 거부하고 당당하게 살기 위해선 여성들의 삶에 족쇄와도 같은 사랑을 버려야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따라서 바바라 노박 역시 사랑은 절대로 안 한다고 맹세한 여성인 셈이다.

바바라 노박이 유명인사가 되면서 캐처 블록은 충격 받는다.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서 남자들에게 난리가 났다는 게 놀라운 것이 아니라 바바라 노박이 엄청난 미인이기 때문. 그래서 인터뷰를 하기로 하지만 이번엔 바바라가 보기 좋게 거절해 무산된다. 캐처는 이에 맞서 바바라도 역시 결혼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평범한 여성임에 불과함을 폭로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반드시 바바라가 자신과 사랑에 빠지게 만들겠다고 호언한다. 그리고 순진한 교수임을 가장해 바바라에게 접근한다.

사랑은 필요 없다고 큰소리 쳤지만 늘 혼자 지내야하는 바바라는 외로움을 타고, 자신의 유명세를 모르는 듯한 이 교수에게 끌려 사랑에 빠지게 된다. 게다가 책에서는 여성들에게 직장에서의 평등을 위해서는 사랑을 거부하고 남자들처럼 즉석 일회용 사랑을 즐겨야한다고 주장하지만 막상 바바라 자신은 캐주얼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위인도 되지 못한다. 한창 두 사람의 사랑이 무르익었을 때 캐처의 음모는 들통이 나고….

영화 <사랑 타도!>는 요즘의 세태를 반영하듯 무조건 바바라가 사랑을 좇아 일(자신의 명성과 자신의 책의 내용을 지키는 책임감)을 완전히 내팽개치는 것으로 그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보 진전한 느낌을 준다.

캐처 블록과의 사랑을 서로 확인한 순간 바바라는 자신이 이러면 안 된다고, 자신은 뭇 여성들에게 자신의 책대로 사는 것을 보여줄 책임이 있는 존재라면서 사랑을 부정한다. 그래서 사랑에 매달리는 역은 자연히 남자인 캐처 블록에게로 넘어간다. 블록이 자신의 일도 집어치고 진정한 사랑을 지키겠다는 역을 맡은 것. 요즘의 세태를 반영하듯 여자만이 사랑을 위해 양보하는 것으로 그리진 않지만 여전히 사랑과 결혼이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임을 강조한다는 점에선 남녀의 역할 구분이 확실해 복잡한 갈등이 없었던 옛날에 대한 향수의 그림자가 언뜻 비친다.

옛날로의 회귀에 대한 그리움이 엿보이는 이 영화는 노골적으로 화려한 60년대 테크니컬러 영화를 본 뜨면서 할리우드 본연의 도피적이고 환상적인 로맨스를 펼쳐 보인다. 그래서 사랑과 일, 가정과 일이라는 두 가지를 놓고 고민하고 갈등하는 현실적인 여성들의 문제는 화려한 로맨스 뒤에 가려버리고 만다.

이남/ USC 영화이론과 박사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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