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산악인 박영석 대장을 추모하는 박영석 음악회가 열린다. 박영석 대장의 생전 지인들로 구성된 출연진이 클래식과 가요, 댄스로 무대를 꾸민다. 사진은 2018년 11월22일 열린 ‘제7회 박영석음악회’ 모습. ©박영석탐험문화재단
매년 산악인 박영석 대장을 추모하는 박영석 음악회가 열린다. 박영석 대장의 생전 지인들로 구성된 출연진이 클래식과 가요, 댄스로 무대를 꾸민다. 사진은 2018년 11월22일 열린 ‘제7회 박영석음악회’ 모습. ©박영석탐험문화재단

 

박영석!

그는 산사나이다. 지금은 히말라야의 산이 된 영원한 산사나이다.

2020년 봄 개관을 앞 둔 박영석기념관이 지금 한창 마무리 공사 중이다. 마포구 상암동 노을공원 안에 짓고 있는 기념관은 박영석 개인을 기리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지금껏 해온 청소년들의 ‘희망 원정대’와 같은 산악활동과 교육의 요람이 될 것이며 일반인들을 위한 행사도 마련하고 그 실천을 목표로 건립되는 것이다. 박영석의 새로운 안나푸르나 등반로 개척은 실패했을지라도 그의 도전 정신은 예술과 사회분야로 새 길을 찾아 성공의 물꼬를 틀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마지막 도전은 2011년 49세에서 멈췄다. 세계적인 산악인이자 위대한 탐험가였던 그의 죽음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의 육신은 안나푸르나에 머물고 있다. 그는 ‘안나푸르나의 별’이 되었다.

그의 이름을 내건 기념관이나 음악회를 말하기에 앞서 박영석의 사람됨과 발자취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1980년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시청 앞을 지나가다가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높은 히말라야 마나슬루봉(8,163m) 등정에 성공한 동국대학교 산악회 환영 카 퍼레이드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평소 산을 좋아했던 그는 그때 동국대학교 산악부원이 될 것을 결심했다. 그는 운명적인 만남의 순간이었다고 훗날 회고했다.

둥그스름한 얼굴에 장난기 가득한 소년 같은 인상과는 달리 그는 자기관리에 철저했고 강인한 체력을 길렀으며 정상에 도전하는 산악인으로서의 정신력으로 크고 높은 산을 향한 발걸음을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밟아나갔다. 마침내 그는 8000m이상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했다. 그는 이에 머무르지 않고 7대륙 최고봉 등정과 남극, 북극 탐험에도 성공, 모든 산악인의 꿈이라고 하는 ‘탐험가 그랜드슬램’(Explorers Grand Slam)을 이뤄냈다. 두 번째 세계기록 보유자가 되었다.

“1%의 가능성만 있다면 도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던 그는 안나푸르나봉에 새로운 ‘코리아 루트(길)를 개척하는 일에 도전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미 산악인으로서 이룰 수 있는 것을 다 이루었으니 더 이상 산을 오를 필요가 있느냐고 그를 만류했으나 “도전하지 않는 것은 산악인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그가 마지막 산행에 도전했을 때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일말의 불길한 예감이 스쳐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도 주위의 걱정을 의식한 듯 ‘마지막 도전’임을 강조하고 네팔로 향했다. 그의 성공 소식을 마음 졸이며 기다리고 있던 어느 날 실종 소식이 뉴스를 타고 흘러나왔다. ‘박영석 대장은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라’는 제목을 대문짝만한 글씨로 써 붙인 신문 기사를 보게 되었다. 갑작스런 기상 변화로 거대한 눈사태가 일어나면서 등반대를 덮치는 불행한 사고가 발생한 것이었다. 구조 헬기를 띄우고 구조대를 급파하는 등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고 국민들도 한 마음으로 그들이 안전하게 돌아오기만을 빌었지만, 박영석과 등반팀의 생환을 고대하던 염원은 물거품이 되었다.

박영석과 친 형제 이상으로 끈끈한 정을 이어온 이인정(전 마나슬루 원정대 대장)은 은 안타깝고 비통한 심정에서 그를 위한 한 가지 계획을 구상했다. 아까운 나이에 설산의 품에 잠들어 ‘안나푸르나의 별’이 된 후배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붙인 추모 음악회를 열기로 한 것이다. 여성산악인 배경미가 섭외, 연출 등을 도맡아 동분서주했고, 가수 윤형주와 영화감독 이장호, 판소리 명창 이영태 등 수많은 사람들이 동참했다. 생전에 그를 후원했던 아웃도어업체 ‘영원’에서도 아낌없는 도움을 주었다.

2012년 10월 ‘제 1회 박영석 추모 음악회’가 열렸다. 그의 아내(홍경희씨)와 두 아들은 물론이려니와 그를 그리워하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막이 열렸다. 추모의 마음을 표현한 공식 식순을 마친 뒤 그의 어록과 생전 모습이 동영상으로 비춰질 땐 어두운 객석 여기저기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공연은 더 할 나위 없이 훌륭했으나 한 마디로 눈물의 음악회가 되었다. 그의 아내는 “앞으로는 이 슬픔을 승화시켜 남편이 갖고 있던 불굴의 도전 정신을 알릴 수 있는 음악회로 나아가기를 바란다”고 했다. 우리는 그 뜻을 받아 2013년부터는 음악회 제목에서 ‘추모’라는 말을 삭제했다. 음악회 준비도 청소년과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일을 하는 ‘박영석 탐험 문화재단’이 주관하게 되었다.

그가 떠난 지 어언 8년째! 우리는 그를 잊지 않았다. 해마다 열리는 박영석 음악회는 한 산악인을 추모하는 데서 출발했으나 이제 산악계 문화행사의 하나로 어엿하게 자리 매김하였다. 음악회의 주제는 분명 산과 산 사람들과 관련된 것이지만 산과 무관한 그 누구라도 함께 할 수 있다. 유명 가수나 연주자 뿐 아니라 도약을 꿈꾸며 무대 경험을 쌓고자 하는 새싹 예술가도 무대에 올랐다. 자연스레 이 음악회를 통한 자연 사랑의 캠페인도 널리 퍼졌다. 캠페인의 파급 효과로 주위의 관심과 후원을 불러 모았고 그 결실로 상암동에 ‘박영석 기념관’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네팔에 있는 세계산악박물관에도 ‘박영석 코너’가 마련되었다.

앞으로 기존의 음악회를 재정비하고 이에 더해 봉사활동영역을 넓힌다는 꿈의 동력을 새로 달아 계속 달려나가고자 한다. 이제껏 음악회를 위해 애쓴 사람들에겐 찬사로, 또 찾아와준 관객들에게는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노래로서 연주회장에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선율은 하늘나라에 있는 그에게도 가 닿으리라.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의 소중함을 깨닫고 더욱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리라는 마음가짐을 지닌 채 극장 문을 나서는 사람들 가슴속에는 이미 박영석 이름 석자가 새겨졌을 터이고 이는 바로 박영석 음악회가 지향하는 뜻을 이룬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제 박영석기념관이 생기면 우리가 할 일, 할 수 있는 일은 더 많아진다. 가슴벅차다. 설산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안나푸르나의 별이 우리 가슴 속에 살아서 영원히 빛나게 하는 일이 이제 우리가 할 일 아닐까 생각해본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