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싱글 동거로 생활비 30만원 줄여

환상 금물 자칫 빚만 지는 사례 될 수도

“화장실에서 또 담배 피웠지? 얼른 내 놔, 만원.”

“야, 한 번만 봐줘라. 너, 진짜 담배 한 대에 너무 하는 거 아냐?”

창문에 얼굴을 내밀고 몰래 담배를 즐기던 남자는 뒤늦게 환기를 시키느라 야단법석이다. 여유롭게 그 우스운 광경을 지켜보던 여자는 다짜고짜 손부터 내민다. 집 안에서 담배를 피우면 벌금 1만원, 남자가 수칙을 어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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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사랑’과 ‘경제’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알뜰형 동거족이 늘고있다. 대형할인 마트에서의 쇼핑은 알뜰형 동거족이 즐기는 기본 데이트 코스 중의 하나. <사진·민원기 기자>

알콩달콩 재미나게 살아가는 동거커플의 일상을 코믹하게 다룬 MBC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에 나올 법한 장면일까? 아니다, 실제 상황이다. 집에서 독립해 현재 남자친구 오한석(31·회사원)씨와 함께 살고 있는 이선영(25·회사원)씨의 이야기.

이씨는 동일한 공간에서 함께 생활을 꾸려가려면 정해진 규칙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처음부터 생활 수칙을 만들었다. 설거지와 청소는 이씨가 하고 빨래와 쓰레기 분리수거, 요리는 남자가 한다. 집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도 금물이다. 또한 메일이나 휴대전화 같은 개인 통신에 관해서도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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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생활비 ‘동거족 이씨 50만원’,

‘싱글족 박씨 71만5000원+α’

‘제 2의 IMF 위기설’이 나돌 만큼 경제가 어려워진 지금, 다시금 증가하고 있는 것이 동거족이다. 이씨도 마찬가지다. 식구들과 자주 마찰이 생겨 독립을 마음먹었지만 혼자 힘으로 집을 구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방법을 구한 것이 고시원. 하지만 한 평 남짓한 갑갑한 방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하기 힘들었고 남자친구와 밤마다 헤어지는 것도 아쉬웠다. 경제적 독립과 사랑을 이유로 동거를 결심한 이씨는 작년 5월 오씨와 각각 1000만원씩 투자해 서교동에 위치한 전세 2000만원에 월세 25만원짜리 원룸을 공동명의로 구했다.

처음 입주할 당시 자취를 하던 오씨는 침대, 냉장고, 세탁기, TV, 식기 등등 웬만한 살림살이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이씨가 들여온 물건이라곤 오디오와 음악 CD, 행거가 전부. 최신형을 자랑하는 29인치 평면 TV는 살면서 이씨가 부담하고 화장대는 오씨가 이씨에게 선물했다. 방 한쪽 공간을 멋지게 차지하고 있는 소파는 둘이 함께 장만한 물건이다.

이선영씨는 요즘 남자친구와 집에서 데이트를 즐긴다. 가까운 할인마트에서 장을 함께 본 뒤 집으로 돌아가 오씨는 이씨를 위해 숨겨둔 요리솜씨를 뽐낸다.

“함께 사니까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복잡하게 밖으로 나갈 필요 없이 식사나 차, 영화도 집에서 해결한다. 마음도 편하고 훨씬 경제적이다.”

이씨의 한달 생활비는 월 50만원선. 월세 12만5000원(월세 25만원을 나눠서 부담), 교통비 7만원, 전화비 4만원, 통신비 3만5000원(이씨가 주로 사용), 식비 23만원, 나머지 전기, 가스, 수도세와 차량유지비(차량 오씨 소유)는 오씨가 부담한다.

얼마 전까지 화려한 싱글을 고집했던 박윤경(28·마케팅)씨. 최근 7년 간의 싱글생활을 포기하고 동성동거를 시작했다. 교통과 생활이 편리한 아현동에 위치한 전세 3000만원, 월세 20만원짜리 원룸에서 혼자 3년을 지냈지만 얼마 전부터 부담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이직을 위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6개월 동안 고급 마케팅 수업을 받으면서부터다. 혼자 살기로 결심한 이상 적어도 자기 계발하는 데 돈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 버는 돈은 없는데 월세 20만원에 각종 공과금 5만원, 교통비 7만원, 전화비 5만원, 통신비 3만5000원, 식비 30만원을 합해 최소한 생활비가 71만5000원이다. 여기에다 적금 30만원 부어야지, 능력개발과 건강을 위해 학원 다니랴, 헬스하랴 한 달에 120만원씩 6개월을 족히 쓰게 됐다. 결국 늘어나는 카드 빚을 감당하기 힘들어 박씨는 집을 처분하고 동거를 선택했다. 지금은 생활비 30만원 정도를 절약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돈의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생활의 지혜까지 얻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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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형외로운 싱글생활을 청산하기 위해 말벗이 될 이성이나 동성 룸메이트를 구한다.알뜰형 주거공간의 전세보증금이나 월세 생활비 등 경제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동거하는 경우다동료형연구,공부,전공,업무 등 학문이나 전문분야에 도움이나 참고가 될 만한 룸메이트를 찾는다함께형스포츠나 레저, 문학등 다양한 취미활동을 함께 즐긴다

살림형·친구형…다양한 동거족

“혼자만 옳다는 이기적인 생각과 소비 지향적인 생활태도가 바뀌었다. 함께 살다 보니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폭이 넓어지게 된다.”

치약을 가운데부터 푹푹 눌러 쓰는 룸메이트에게 가끔 짜증도 나지만 그것은 스스로가 이해해야 할 생활 습관일 뿐, 옳고 그른 가치 판단을 내릴 계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홍대쪽에 좋은 원룸입니다. 옵션은 기본, 컴도 있어요. 그냥 몸만 들어오셔도 돼요. 집은 현재 400만원에 52만원인데, 서로 반반씩 부담하고자 합니다.” - 강남가이(샤필)

“주상복합형 신축오피스텔 21평. 거실, 베란다 무지 넓고 180만원에 73만원입니다. 담배 안 피우고 조용한 성격입니다. 가전제품은 모두 있으니 룸메이트는 몸만 오시면 됩니다. 성별 구분 없이 사람냄새 풍기는 좋은 생활파트너면 좋겠습니다.” - hong(링크 클럽)

최근 인터넷에 동거를 주선하는 사이트는 20개 정도. 위의 구인광고처럼 주거공간의 전세보증금이나 월세, 생활비 등의 경제적 부담을 나누기 위해 룸메이트를 구하는 알뜰형이 이런 사이트를 가장 많이 찾는다. 그 외에 살림을 시키려는 살림형, 말벗을 만들기 위한 친구형, 공부에 도움을 받으려는 동료형, 레저나 문화를 함께 즐기려는 함께형 등 룸메이트를 구하는 이유에 따라 동거족도 다양한 분류로 나눠진다.

2001년 6개월간 남자친구와 동거 끝에 지난해 결혼에 골인한 황선아(28·회사원)씨는 알뜰형이다. 남자친구가 지방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빠듯한 생활에 주말이면 발생하는 교통비, 데이트비, 숙박비를 감당하느라 경제적으로 힘들었다. 하지만 남자친구가 대학원을 서울로 오면서 그 짐을 조금이나마 벗을 수 있었다. 매달 고정적으로 나가던 월세와 데이트비용, 교통비, 숙박비 등이 줄어들어 이후 20만원짜리 적금을 꾸준히 붓게 됐다고.

회원 1만명을 확보하고 있는 동거 사이트 샤필에 가입된 회원 중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 전체 60% 이상을 차지한다. 즉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이 동거에 대해 가장 적극적이다.

회원수가 2만4000명을 넘은 또 다른 동거사이트 링크 클럽. 하루 20명씩 가입회원이 늘고 있다. 링크 클럽에서는 최근 자체 회원을 대상으로 “어떤 목적으로 이성동거를 하겠느냐”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결혼 전 상대를 미리 알기 위함(44%)”이라는 대답이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상호 경제적인 목적을 위해(34%)”, 그리고 “성생활의 방편(17%)”, “호기심(5%)” 순이었다. 상대방을 미리 알고, 동시에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는, 일종의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는 혼전 동거에 대해서 사회적 공감대가 넓어지고 있다.

여기에 대해 링크 클럽 운영자는 동거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와 회원 수 증가의 원인을 “주거비용 절감”, “동거 관련한 매스컴의 영향”, “성격차이로 인한 이혼의 극복 대안”으로 꼽았다.

또한 동거에 관해 “전통적인 가족제도를 붕괴하고 사랑에 대한 숭고한 가치를 하락시킬 우려”는 있지만 “상대방을 미리 알고 결혼함으로써 혼인 후 배우자의 불확실성에서 해방”되며 “결혼을 전제로 한 커플은 경제적인 관계를 지속”할 수 있어 긍정적이라고 답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가부장제 가족제도하에서 동거는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무작정 동거에 대한 환상을 가지는 것은 위험하다. 지난 해 6월부터 5개월간 동거 후 결혼식을 올린 서인희(29·프리랜서)씨는 동거가 경제적이며 실속적이라는 일반적인 통념에 회의적이다. 서씨도 결혼을 앞두고 경제적인 이유로 7년 사귄 남자친구와 살림을 합쳤지만 오히려 빚만 졌다. 동거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이익보다는 유흥에서 오는 소비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사업으로 수입이 일정치 않은 남자친구의 생활비를 대신 책임지다 보니 예상외로 지출이 많아진 것이다. 해서 “동거를 경제적 공동체로 인식할 경우 상대방의 빚까지 책임져야 할 상황이 닥칠지 모른다”며 실질적인 충고를 덧붙였다.

현주 기자soon@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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