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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향미>

인생의 장년기에 들어서야

자기본성 알려는 용기 가져

L선배는 자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사람들에게 아버지가 살아 계신지 물어보는 버릇이 생겼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면, 두 가지 양면적인 감정이 든다고 했다. 하나는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셔서 참 좋겠다’하는 부러움의 감정이고, 다른 하나는 ‘너도 뭘 모르겠구나’ 라는, 결국엔 알아야 할 것을 아직 모르는 사람에 대한 일종의 연민의 감정 같은 것이 든다는 것.

곰곰이 생각해보면, 젊어서 좋다는 것은 ‘뭘 모를 수 있어서 참 좋겠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젊은이들도 결국에는, 알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젊은이들이 누리는 행복은 시한부 행복일지도 모른다.

나는 1년 넘게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노인문제 상담을 한 적이 있다. 이 상담을 하면서 나는 요즘 젊은 사람들이 생각보다 더 부모님(시부모님)에 대해 걱정한다는 것을 알았고, 특히 아들이나 며느리 못지 않게 딸들이 부모의 부양과 보호 문제를 걱정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하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역시 고부갈등이었다. 물론 며느리들도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세대간의 넘기 힘든 간극에 있는 것 같았다. 특히 모녀간이라면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도 고부간에는 미움의 싹이 되기 일쑤였다.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어떤’이라는 ID의 결혼생활 14년차 30대 며느리는 매우 격앙된 어조의 메일을 보내왔다. 자기가 시댁식구는 물론 남편에게 오랫동안 감쪽같이 속아왔다는 것이다. 결혼 8년 후에야 남편에게 두 명의 어머니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그 후 또 6년이 지난 후에 이번에는 자기가 모시는 남편의 친어머니가 사실은 호적상 남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시어머니는 젊었을 때 혼외관계로 남편을 낳았고, 또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 다른 아들을 두었으며, 지금도 호적상으로는 그 아들의 어머니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 며느리의 질문의 핵심은 호적상 남남인 시어머니에 대한 법적인 부양의무가 자신들에게 있는가, 호적상의 아들이 모셔야 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며느리는 특히 법적인 조언을 해줄 것을 여러 번 강조했다. 도덕적인 면을 따지자면 시어머니는 더 할 말이 없을 테니, 법적인 내용만 알고 싶다는 마음이 행간에 배어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가족법 전공자의 자문까지 받은 결과, 나는 그녀의 남편도 호적상의 아들과 공동으로 부양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대답해 주었다. 즉 그녀의 시어머니는 비록 호적상으로는 남남이지만, 남편의 친어머니로서의 모든 법적인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며느리가 느꼈을 당혹감과 배신감을 이해할 수 있다. 남편을 포함한 가족들로부터 진실을 더 빨리 들을 수 있었다면 충격이 훨씬 덜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동시에 그 시어머니의 마음도 헤아려 보았다. 자신을 도덕적으로 타락한 더러운 여자로 여기며, 십몇 년이나 속아 살아온 것에 분노하면서 더 이상 같이 살고 싶어하지 않는 며느리에게, 시어머니는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제 인생의 봄밖에 알지 못하는 젊은 며느리에게 뭐라고 말할 것인가? 잔인하도록 뜨거웠던 여름을 보내고, 비로소 거울 앞에 돌아와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을 시어머니의 마음은 어땠을까? 만약 내가 그 시어머니라면, 딱 한 마디만 했을 것이다. “니들이 인생을 알어?”

젊음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을 추구한다. 인생을 흑과 백으로 나누고, 선과 악이 분명히 갈라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어쩌면 젊음의 특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도 언젠가는 이 세상의 선과 악은 나눌 수 없을 만큼 혼합되어 있어서 아무리 바른 사람이라도 과오가 있으며, 자기 자신의 내부에도 선과 악이 함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어느 누구의 인생에도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자기 성취와 자기 패배가 뒤섞여 있기 마련이라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융(C.G. Jung)은 인생의 어두운 부분을 포함한 자기 전체를 받아들임으로써만이 인간으로서 완전히 발전하고 개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인생의 장년기에 들어서야 청년시대의 이상주의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자기 본성을 알려는 용기를 가지며, 선과 악마저도 통합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당신이 시어머니라면, 세대간의 차이에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그래도, 나는 젊은 며느리의 나이를 살아본 시어머니가 더 너그러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 화가 나면 “너도 늙어봐라”라거나 “어디 두고 보자”라고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전에는 ‘나중에 두고 보자는 사람 무섭지 않다’는 얘기가 설득력이 있었다. ‘어디 두고 보자’며 한을 품은 사람일수록 이를 악물고 속상해 하느라고 더 빨리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평균수명이 길어진 지금, ‘두고 보자’는 말은 무서운 말이 되었다. 결코 짧지 않은 인생 여정에서는 ‘두고 볼’ 시간도 길어질 수밖에 없고, 실제로 두고 보다 보면 얄밉던 며느리도 어느 덧 할머니가 되고야 말 테니.

하긴 시어머니의 기억력도 문제이긴 하다.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며느리 야단치기 바쁜 시어머니들은 다음과 같은 일본식 하이쿠 한 수라도 기억하시면 어떨까?

홍시여, 이 사실을 잊지 말게/너도 젊었을 때는/무척 떫었다는 것을

한혜경/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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