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경 칼럼] 세월의 선물
[정진경 칼럼] 세월의 선물
  • 정진경 사회심리학자
  • 승인 2020.01.03 07:50
  • 수정 2020-01-01 18: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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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 아버지의 사촌동생 마포아저씨께서 새해 문안을 오신다. 매해 1월 1일 11시경에 오신지 수십 년이 되었다. 이쯤 되면 칸트 못지않다. 연세가 있으시니 한 10년 전부터는 아들이 차로 모시고 온다. 백발의 구순 노인(95세, 91세) 두 분이 식혜를 나누며 담소를 하신다.

“너도 좀 있으면 구순이지?”
“네, 올해 구순이에요.”
“벌써 구순이라고?”
“아유, 언니만 연세 잡숫고, 저는 뭐 나이 안 먹나요?”

두 분이 마주 보고 하하 웃으시는데, 그 장면이 아름답다. 

오랜 세월 거의 전통이 된 새해문안도 그렇고, 네 살 아래 동생이 쓰는 깍듯한 존댓말도 참 고전적이다. “언니”는 “연세”를 “잡숫고,” “저”는 “나이”를 “먹는다.” (형을 ‘언니’라 부르는 것은 예전 서울 사투리) 눈 앞에 펼쳐진 이 장면이 예법 책을 펼쳐 놓은 듯도 하고 사극의 한 장면을 보는 듯도 하다.

우리말의 엄격한 서열주의 문화에 나는 다소 삐딱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 겨우 몇 살 차이에 이렇게 깍듯이 존댓말, 반말을 쓰다니. 하지만 어른들은 그런 문화에서 자라나 그 말씨가 자연스러울 뿐, 상호 존중에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지금 나보고 하라면 그런 존대는 위로도 아래로도 사양하겠지만.

이제 그 세대는 남아계신 분이 많지 않다. 어머니는 가신지 몇 해 되었고, 아저씨 댁 아주머니는 요양원에 계신다. 거의 한 세기에 걸친 우애, 많은 일을 겪으며 살아온 그 세월을 서로 지켜본 사이에는 특별한 무엇이 있다. 형제자매도, 친구도, 부부도.

나이 들면서 자연히 나이듦에 대한 생각이 많아진다. 한국 사회에서 경로사상은 사라지고 있다. 아직 예의는 좀 지키지만 존경하지는 않는 것 같다. 문화변동에 가속도가 붙은 시대에 노인들은 적응이 어렵고 효용성이 떨어진다. 나이 많다고 차별하는 경우가 늘다 보니 나이차별주의(agism)라는 용어가 생겨난 지도 한참 되었다. 나이가 많다고 무조건 존중하라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 것처럼, 나이가 많다고 무조건 뒤로 물러나라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나이가 많이 들면서 생기는 장점은 무엇일까.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박경리 선생의 초탈한 경지는 감동적이다. 올리버 색스는 죽음을 앞두고, "솔직히 두려움이 없다고 말하지 않겠지만 감사하다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든다"고 했다. 인식이 있는 존재, 생각하는 동물로 이 아름다운 행성에 살 기회가 주어진 것만으로도 엄청난 특혜와 모험이었다고 했다. 멋지다!

변하는 시대일수록 동년배란 얼마나 좋은가! 경험을 공유하며 오랜 세월 쌓인 정도 있고, 얼굴에 패인 주름을 보는 애틋함도 있고, 살아내느라 수고 많았다는 경의도 있다. 젊은 시절에도 우정이나 사랑은 비할 데 없이 소중하지만, 세월의 풍파를 견뎌낸 노인들의 깊은 정에는 특별한 무언가가 더해진다. 그래서 손잡고 산책하는 노부부가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고, 마주 앉아 웃는 백발의 친구들이 더없이 좋아 보인다.
고전의 향기가 나는 한 장면에서 같이 늙어가는 동년배의 소중함을 느낀 오늘, 옆에 있는 사람에게 뭐 하나라도 더 잘하고 멀리 있는 친구에게 전화라도 한 통 더 넣어야겠다. 아직 시간 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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