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법] 우리 모두 성인지감수성을 고양해야 하는 이유
[모두의 법] 우리 모두 성인지감수성을 고양해야 하는 이유
  • 박찬성 변호사‧포항공대 상담센터 자문위원
  • 승인 2019.12.27 09:32
  • 수정 2019-12-27 09: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상에 죄 짓고 사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다른 한편으로 많은 이들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하루하루를 건실하게 살아간다. 필자야 먹고사는 일이다보니 법원과 검찰청 드나들기를 밥 먹는 것보다도 자주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야 어찌 그렇겠나. 세상이 그나마도 이만큼이나마 유지되고 있는 것은 나쁜 사람보다는 착한 사람이 더 많다는 방증일 터. 그러니, 저 멀리 있는 대법원에서 ‘성인지감수성’을 강조하든 말든 평균적인 시민들의 삶과는 무관한 이야기이리라. 근데 맞는 말일까? 정말 그래도 될까?

국민참여재판제도가 도입된 것은 2020년 햇수로만 13년이 된다. 국민참여재판법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 법에 따라서 국민참여재판에 참여할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 국민참여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것은 법률에 따른 신성한 의무다. 각 지방법원의 관할 구역 내에 거주하는 만 20세 이상 국민은 배심원후보예정자 명부에 올라서 배심원후보자 선정 통지를 받을 수 있다. 직업 등에 따른 제외사유, 제척사유, 면제사유에 해당되지만 않는다면 배심원으로서 직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한들, 때로는 법 없이 살아서는 결코 아니 되는 중차대한 의무를 지게 될 경우가 있는 것이다.

어느 국민참여재판의 실제 사례다. 피고인(남성)이 어느 날 새벽에 열린 창문을 통해서 여성 피해자의 방 안으로 침입하였다. 피고인과 피해자는 이전에 교제를 하던 관계였다. 피고인은 잠을 자고 있던 피해자의 몸 위에 올라 타 앉은 후 “사람을 죽였다. 너도 죽을래?”라며 협박하고서는 손으로 피해자의 입을 막고 피해자의 신체를 함부로 만지다가 피해자의 반항을 억압한 후 피해자를 강제로 범했단다.

이 사건에서 검찰은 주거침입강간 등으로 피고인을 기소하였다. 하지만 위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두 사람이 2년간 동거를 했던 점, 동거관계 종료 이후에도 ‘원만한’ 관계가 유지되었던 점, 피고인은 피해자와 사귀던 동안에도 창문을 통해서 피해자 방으로 몇 차례 들어간 적이 있었던 점, 성관계 직후 피고인이 피해자의 반항을 더는 억압하지 않고 곧바로 퇴거한 점, 피해자가 소리를 지르는 등의 구조요청을 하지 않은 점, 사건 이후 피해자와 피고인이 문자메시지 또는 통화를 주고받은 사실이 있는 점 등을 근거로, 강간에 대하여는 무죄 취지의 판결이 내려졌다. 재판부의 독단적인 견해였느냐고? 아니다. 놀랍게도 강간의 점에 대하여는 배심원 7명 중 2명만이 유죄 의견을, 무려 나머지 5명이 무죄 의견을 피력하였단다.

필자가 직접 관여한 사건은 아니므로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판결문에 나타난 제반 상황으로 미루어 추측건대 위와 같은 사안에서 강간이 유죄로 인정되지 않은 것은 의문스러운 점이 크다. 누구나 배심원으로서 형사재판에 참여할 수 있는 이 시대에 법관이나 검사, 변호사뿐만 아니라 시민들 모두가 성인지감수성 증진을 위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필요는 이러한 사례만으로도 넉넉히 뒷받침될 수 있으리라.

법원은 국민참여재판을 거쳐 인정된 사실관계 및 그에 대한 법적 평가는 새로운 증거가 추가로 발견되었다거나 그 밖에 배심원들의 판단을 도저히 수긍할 수 없을만한 특단의 이유가 없는 한 그대로 존중함이 옳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그렇기에 언젠가는 배심원이 될 수 있는 시민들 누구나 올바른 성인지감수성을 체현해야 할 이유는 그만큼 더 커진다고 할 수 있다.

국민참여재판 이외에도 시민들의 사법적 절차에 대한 관여의 정도는 점차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필자가 변론했던 어느 사건에서 기소 여부에 관한 검찰시민위원회의 시민위원들의 의견을 사건기록에서 접했던 일이 있다. “합의까지 다 해놓고 나서도 처벌을 원한다는 것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다.”라는, 어느 시민위원의 의견이 기억에 선명하다. 맞는 말일까? 필자의 경험에 따른다면 언제나 옳다고 보기는 어렵다. 피해자들 중에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합의는 해 주면서 가해자에 대한 선처를 용인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처벌 자체를 아예 원치 않는 것은 아닌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성인지감수성 개념이 충분한 성찰 없이 남용되는 측면이 혹시 있는 것은 아닌지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 경청할 만한 지적이라고 본다. 늘 염두에 두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보다 원숙한 성인지감수성을 갖추고서 양측의 주장을 주의 깊게 곱씹어 볼 때, 보호받아 마땅한 피해자의 목소리를 섣불리 간과해 버리는 일도, 억울하게 가해자로 몰리는 사람의 항변을 가벼이 무시해 버리는 일도 함께 줄여나갈 수 있게 되지는 않겠는가.

박찬성 변호사
박찬성 변호사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사가 마음에 드셨나요?

여성신문은 1988년 창간 이후 여성 인권 신장과 성평등 실현을 위해 노력해 온 국내 최초, 세계 유일의 여성 이슈 주간 정론지 입니다.
여성신문은 여성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여성인 '안전, 사회적 지위, 현명한 소비, 건강한 가족'의 영역에서 희망 콘텐츠를 발굴, 전파하고 있습니다.
저희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좋은 기사 후원하기를 해주세요.
여러분의 후원은 여성신문이 앞으로도 이 땅의 여성을 위해 활동 할 수 있도록 합니다.

여성신문 좋은 기사 후원하기


※ 소중한 후원금은 더 좋은 기사를 만드는데 쓰겠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50 (3가 222번지) 골든브릿지빌딩 1층, 9층
  • 대표전화 : 02-318-9300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신준철
  • 제호 : (주)여성신문사
  • 사업자등록번호 : 214-81-03304
  • 대표이사 : 김효선
  • 발행·편집인 : 김효선
  • 여성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0 여성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admin@wome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