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양정자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 원장
“여성 돕자” 이태영 박사 권유에
법대 4학년 때 법률구조 첫 발

95년 문 연 가정법률복지상담원
소외계층 위해 상담·소송 무료 지원
20년 간 32만건 법률상담 지원
“약자 돕는 법률구조 뿌리 내려야”

양정자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 원장은 “소외계층을 위한 법률복지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법률구조서비스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차윤회 객원 사진기자
양정자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 원장은 “소외계층을 위한 법률복지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법률구조서비스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차윤회 객원 사진기자

 

법률구조법인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이하 상담원)이 올해 창립 20주년을 맞았다. 1995년 상담원을 만들어 20년 간 이끌어 온 양정자(75) 원장은 “법률구조의 주춧돌을 쌓을 수 있도록 도움 주신 분들이 계셨기에 20년을 버틸 수 있었다”고 지난 소회를 밝혔다.

양 원장은 스물 두 살 무렵부터 53년 넘게 이혼 상담과 법률구조사업에 헌신하며 가족법 개정운동에 앞장선 여성인권운동가다. 50년 넘게 양 원장이 맡은 이혼 상담만 자그마치 16만 건이 넘는다. 결혼하지 않은 양 원장은 직접 결혼을 경험하진 않았지만 수십 만명의 결혼사와 이혼을 접한 베테랑이다.  

이화여대 법학과 62학번인 그는 그 곳에서 우리나라 여성 최초 법조인이자 인권운동가인 이태영 박사의 수업을 듣고 처음 상담 현장을 찾았다.

“제가 2학년 때 학장이던 이태영 선생님이 미국 하버드 로스쿨에서 재학생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무료 변론을 하는 현장 실습을 벤치마킹해 이화여대에 도입하셨어요. 저희 동기들이 첫 현장 실습생들이었어요. 당시 가정법률상담소는 호암아트홀 맞은 편 작은 가옥이었어요. 그곳에서 남편의 폭언과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을 마주했죠. 법률학도인 자신의 말에도 연거푸 감사 인사를 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갔죠.”

양 원장을 눈여겨 본 이태영 박사는 “네가 받은 혜택을 사회를 위해 갚아야 한다”고 말하며 함께 일하자고 권했다. 고등교육까지 받는 여성이 흔치 않던 시절, 배운 것을 남을 위해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양 원장은 1966년 2월 대학을 졸업한 직후 그 길로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 들어갔다. 50년 법률구조 인생의 시작이었다.

“당시 제게 주어진 진로는 세 갈래였어요. 사시를 쳐서 변호사를 하거나 대학원에 진학해 교수를 하거나 결혼하는 것이었어요. 셋 다 내키지 않아 선생님 말씀을 따랐죠.”

길 밖에서 새 길을 찾기로 한 양 원장은 그때부터 가정법률상담소의 법률상담과 함께 국내 지부와 해외 지부를 만드는 일에 집중했다. 더 많은 여성들이 더 가까이 법의 혜택을 받을 수 있으려면 많은 곳에 상담소가 문을 열어야 했다. 국내 27개 지부, 미국 12개 지부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지부가 처음에는 잘 운영되다가도 그 곳을 만든 이가 사라지면 곧바로 운영이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저는 사람 중심이 아닌 뜻을 중심으로 지부를 만든다는 원칙을 세우고 곳곳을 누볐죠.”

1999년 55세에 가정법률상담소에서 정년퇴임 한 그는 주변의 권유에 지금의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을 창립했다. 사무실을 내준 독지가와 십시일반 기부를 해준 후원자들이 더 많은 일을 해달라며 설득했다. 이후 20년 간 상담원에서 진행한 법률상담은 약 32만9000건. 돈 없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법을 알지 못해 호소할 길조차 찾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상담원은 무료로 법률구조사업을 제공했다. 호주제 폐지 등 가정법 개정운동과 대중매체를 통한 의식화 운동도 펼쳤다. 상담원이 개원 때부터 2019년 8월까지 20년 동안 상담한 총 32만472건 중 이혼·사실혼 등 부부관계 상담 내용을 살펴보면 20년간 부부의 이혼사유 변화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이혼 내담자들이 응답한 이혼사유 부동의 1위는 폭언·폭행(24.6%)이었다. 경제적 문제(19.71%), 성격차이(14.82%)가 그 뒤를 이었다. 여성의 경우 남편의 폭언·폭행을 이혼사유로 꼽는 비율(28.5%)이 가장 많았으나 남성은 성격차이(22.31%)를 1순위로 꼽았다. 최근에는 경제적 문제를 이혼사유로 꼽는 비율이 남녀 모두 높아지고 있다. 3년 전까지 13.3%였으나 올해는 19.71%로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같은 상황에 처한 여성이 찾아와도 1970년대와 2019년을 비교하면 상담 내용은 확연히 달라요. 과거에는 남편이 칼을 들고 위협한다고 온 여성에게 ‘남편에게 찌르라고 덤비면서 맞대응하세요’라고 권했어요. 여자가 세게 나오면 남자들이 놀라면서 오히려 차분해졌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절대 그렇게 말하지 않죠. 분노를 참지 못하는 남자들이 많아서, 칼을 들고 위협하면 ‘미안하다고 하고 그 자리를 피하라’고 말해요. 일단 살고봐야죠.”

양 원장은 무작정 이혼을 말리기 보다는 “행복을 택하라”고 조언한다고 했다.

“죽는 것보다 이혼하는 것이 낫지 않나요. 바람 피운 배우자가 이혼을 요구하면 ‘누구 좋으라고 이혼 하느냐’며 결혼을 유지하려는 분들도 있죠. 그런데 그러다 정신병을 얻는 건 본인이에요.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상처주기 위해 왜 귀한 나를 죽이는 짓을 하나요. 자신을 사랑한다면 싫어하는 사람과는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어요.”

양 원장이 2020년 이루고 싶은 소망은 월세 살이를 끝내고 상담원 건물을 마련하는 것이다. 1999년 가정법률상담소 퇴직금으로 받은 5000만원 전액을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에 내놨고,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땅 4만9600㎡(약 1만5000평)을 기부한 것도 상담원이 조금이라도 안정적으로 운영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는 사옥 마련과 함께 법률구조서비스가 사회적 약자를 돕자는 본래 취지에 맞게 운영될 수 있도록 지원이 늘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3일 미국, 영국, 네덜란드 등에서 활동하는 법률구조 학자와 활동가를 초청해 ‘2019 법률구조 국제컨퍼런스’를 연 것도 한국 법률구조제도의 개선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우리나라도 법률구조서비스를 시작한지 5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정의를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아직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적은 것 같아요. 소외계층을 위한 법률복지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이 필요해요.”

*양정자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 원장
법률구조사업과 가족법 개정운동에 헌신한 여성인권운동가. 이화여대 법학과를 졸업했고, 동대학원에서 가족법으로 석사 학위를, 원광대학교에서 사회보장법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앞서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서 33년 동안 재직하며 국내외로 40여개의 지부를 개설했다. 1999년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을 창립했으며 53년 동안 16만건이 넘는 상담을 해왔다. 그간의 공로로 국민훈장 석류장, 인권유공자상을 수상했다.

 

저작권자 © 여성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