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러므로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Es ist geschehen, und folglich kann es wieder geschehen. Darin liegt der Kern dessen, was wir zu sagen haben)” 나치시대에 홀로코스트로 희생된 유대인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베를린 홀로코스트 추모관 입구에 쓰여져 있는 글귀이다.

역사는 기억과 망각의 투쟁이다. 잊혀진 역사는 더 이상 역사가 될 수 없기에 모든 역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투쟁을 벌인다. 그것이 승자의 역사든 아니면 패자의 역사든 기억하기는 역사적 진실을 밝혀줄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사람들의 기억하기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시간이 흘러 직접적인 가해자와 피해자가 사라지고 당장의 이익이 과거의 아픈 역사 보다 더 크게 보이게 되면, 어설픈 화해와 적당한 타협의 유혹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피해자가 가해자에 대한 진정한 사죄 요구를 포기하는 순간, 진실이 가려지고 역사의 왜곡이 시작된다.

이런 점에서 곧 발의될 두 개의 법은 매우 우려스럽다. 문희상 국회의장이 대표 발의하는 ‘기억·화해·미래재단 법안’과 ‘대일 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이 그것이다. 일제 징용 배상 문제 해결을 위해 한·일 기업의 자발적 출연금과 국민 성금 등으로 ‘기억·화해·미래재단’을 만들어 위자료를 지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피해자가 재단으로부터 위자료를 받으면 피해자는 더 이상 법적 권리를 행사할 수 없게 된다. 그것도 일본의회가 아니라 우리 국회가 나서서 사죄도 용서도 구하지 않는 일본정부의 가해의 역사를 청산해주겠다는 것이다. 분노를 넘어 기괴함마저 들게 한다.

이미 피해자단체와 시민사회단체는 일본에 의한 가해의 역사가 아니라 외교적 갈등을 일으키는 피해자를 청산하는 방식일 뿐이라고 법안의 몰역사성을 비판했다. 또한 일본기업에 배상 명령을 내린 대법원의 판결에 반할 뿐만 아니라 재단의 위자료 지급을 거부하고 배상을 원하는 피해자들이 법적 절차를 강행할 경우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점에서 현실성도 없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법안을 발의하겠다는 명분은 오직 하나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 구축이다. 과연 이 법안이 지향하는 미래는 누구를 위한 어떤 미래인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역사의 매듭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징검다리이다. 과거의 역사에 대해 오늘 우리가 내리는 결정은 미래세대가 쓰게 될 역사의 첫 장이 된다. 역사의 화해는 가해자의 진정한 사죄와 용서, 치유의 과정을 필요로 하는 지난한 과정이며, 목전의 이익과 현안에 밀려 쫓기듯이 소수의 국회의원들이 “해치워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해자가 사죄를 했다고 해서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용서를 했다고 해서 피해자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도 아니다. 또 이 모든 과정을 거쳤다고 해도 상처는 피해자인 우리의 역사에 오롯이 남겨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해자와 피해자의 화해는 한 번에 이루어질 수도, 이루어져서도 안된다.

“화해의 역사”가 필요하다. 화해를 목적으로 한 꾸준한 노력들을 이어가는 역사, “화해의 역사로서의 역사”를 하나하나 만들어 나가야 한다. 국민의 대표기관인 의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망각이라는 괴물과 끈질기게 싸우면서, 우리 안의 성찰과 일본의 역사에 대한 책임을 이끌어내고, 이 토대 위에 화해의 역사로서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가해자의 책임을 면탈한 ‘문희상안’은 그 시작점이 될 수 없을뿐더러, 정의로운 해결을 위해 노력해온 한·일 시민사회와 국제사회의 화해의 역사의 근간을 해체시키는 것임을 자각해야 한다. 가해자의 반성과 책임의식이 없는 피해자의 화해 제스처는 굴욕일 뿐이다.

김은주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소장
김은주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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