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시간이었다. 청소년들에게 ‘나는’으로 시작하는 글을 써보자고 했다. ‘나와 연구에 대해 쓰고 말하기 대회’라고 이름 붙이긴 했지만, 늘 만나는 사람이고 늘 만나는 공간이었기에 대충 쓰고 말 줄 알았다. 3줄 요약의 시대에 140자 이상의 글을 쓰는 것도, 읽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라는 막연하고도 당연한 주제이니 한 두줄 쓰고 대강 말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생각과 달랐다. 다들 말이 없이 쓰기 시작했고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났다. 각자 차지한 자리에서 종이 위로 연필이 사각사각 지나가는 소리만 났다. 핸드폰을 하는 것도 아니고,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연필과 종이로 한 시간이 지나갔다. 그것도 더 쓰려고 하는 걸 시간 관계상 진행 발언으로 멈추게 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씁시다.”

사회는 청소년의 동기와 흥미를 얄팍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누구도 자신을 소외시키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자신의 삶과 세상을 연결 시켜 이해하고 싶은 마음은 오히려 10대에 더 강할 수 있다. 매주 토요일 4시간의 시간을 내서 10대의 삶을 연구해보겠다고 모인 사람들을 만나며 인간의 존엄성과 가능성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엎어져 자는, 게임만 하는,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이미지로 청소년을 말하는 사회는 오히려 그들 삶의 조건과 맥락은 삭제한 채로 기회를 박탈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청소년은 그것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기 관찰의 결과는 아닐까?

물론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노트앱에 하고 싶은 말이 서른 줄이 넘어갔다. 종이 위에 쓰던 사람 중에는 세장을 넘겨 쓴 사람도 있고, 두줄에서 멈춰있는 사람도 있었다. 쓰고, 말하기 대회이니 발표를 해야 했다. ‘누가 먼저 발표할까. 앞에 나가서 해야해? 가위바위보 할까’하며 깔깔대다 먼저 하고 싶은 사람이 시작했다. 읽는 사람은 늘 당차고 너그러운 ‘나무’였다 (나무는 그가 이곳에서 쓰는 이름이다). 나는 진행자로서 기록용 사진도 찍고, 다른 사람이 쓴 글도 정리하며 느긋이 듣고 있다가, 순간 마음이 찡하네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바로 나무가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혹스럽게도 그 공간에 있던 많은 이가 울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항상 당근이 필요했고 당근을 얻기 위해 노력한 적도 있었지만, 채찍질만 돌아왔다. 내가 말이 되길 거부하기까지.’ 라는 부분을 읽던 중이었다. 울려고 시작한 건 아니었다. 울 분위기도 아니었다. 촛불도 없고, 조명도 없고, 한 낮의 일상 공간이었다. 하지만 공동의 감정이 끄집어내져 의미가 되었을 때, 눈물도 같이 나왔다.

그리고 사회에 드러나지 않은 ‘지식’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다듬어지지 않은 말들이 이야기가 되어 결합되고 연결되었다. 매일 수 은 일을 겪지만, 그 모든 것이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문화적으로 의미가 부여되어, 언어를 얻은 것만이 이야기가 된다. ‘이상하게만 느껴졌던 나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10대의 말은 그동안 ‘이상하게’만 취급되었던 소수자의 경험이 맥락화 되고 의미화 되는 경험을 잘 드러내준다. 연구에 치유의 힘이 있다면 내 경험이 이야기가 되고, 그것을 진지하게 듣는 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낮의 귀기울이는 공동체가 소중한 이유다.

함세정 하자센터 10대 연구소 판돌·덕성여자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겸임교수
함세정 하자센터 10대 연구소 판돌·덕성여자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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