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9일 향년 83세로 숙환으로 별세했다.ⓒ뉴시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9일 향년 83세로 숙환으로 별세했다.

사단법인 대우세계경영연구회는 김 전 회장이 연명치료는 하지 않겠다는 평소 뜻에 따라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김 전 회장은 2017년 서울에서 열린 ‘대우창업 50주년’ 기념행사에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행보가 공개된 적 없었다.

샐러리맨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한 그는  31세 때 창업을 하며 기업인으로서 새 출발한다. 1967년 자본금 500만원에 직원 5명으로 대우실업을 창업한 이후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부도를 맞기까지 30여 년 간 승승장구하며 자산규모 기준 국내 2위까지 성장시켰다. 1년 중 해외 출장 239일, 이동거리만 50만km를 돌며 세계 500위권 그룹 반열에 올려놓기까지 그는 30년 간 딸 결혼식과 아들 장례식 이틀만 쉬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김 전 회장은 ‘세계경영’을 기치로 한 대우실업은 1969년 한국 기업 중 처음으로 호주 시드니에 해외지사를 설립한 데 이어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미국 등에 의류 및 원단을 수출해 신흥국 출신 최대의 다국적기업으로 대우를 성장시켰다. 세계경영은 20세기 말 국제화, 세계화가 낯설게 들린 시절, 대우그룹의 모토이기도 했다

1975년 한국기계, 1978년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 대한조선공사 옥포조선소(대우조선해양) 등 부실기업을 인수, 단기간 내 경영정상화를 이뤄 한국의 중화학산업화를 선도했다. 대우증권의 전신인 동양증권 등을 인수하고 대우건설 등 금융, 전자, 중공업 등 분야까지 영역을 넓혔다.

대우실업은 1978년 국내 기업 중 186억 달러로 당시 한국 총 수출액(1323억 달러)의 14%를 차지할 정도로 수출 1위를 달성하며 빠르게 성장했다.

김 전 회장은 1982년 주식회사 ㈜대우를 설립해 재계 4위에 올랐다. 1983년 국제상업회의소에서 3년마다 수여하는 ‘기업인의 노벨상’인 국제기업인상을 아시아 기업인 최초로 수상했다. 1989년 출간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6개월 만에 100만 부를 돌파했으며 1992년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고려할 정도로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1999년 해체 직전까지 대우는 41개 계열사와 600여 개 해외법인,지사망, 국내 10만명, 해외 25만명의 고용 인력을 토대로 해외 21개 전략국가에서 현지화 기반을 구축했다. 당시 자산총액은 76조87000억원, 매출은 91조원(1998년 기준)이었다.

그러다 1997년 외환위기를 끝내 넘지 못하며 대우그룹은 해체하며 그도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1999년 그룹이 유동성 위기로 워크아웃 후 해체되면서 이후 계열사들은 공중분해돼 ‘대우’란 이름은 자취를 감췄다. 현재 대우 사명을 쓰는 회사는 대우건설, 위니아대우(옛 대우전자), 대우조선해양(옛 대우중공업 조선해양부문), 미래에셋대우(옛 대우증권) 등만 남았다.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 분식회계를 주도한 혐의로 2006년 징역 8년 6개월에 17조원 대 추징금을 선고받아 복역하다가 2007년 특별사면을 받았다.

그는 사면 후 전직 대우인들과 대우세계경영연구회를 결성하고 ‘제2의 고향’ 베트남 등을 오가며 글로벌 청년사업가 양성 프로그램에 주력했다. 해당 프로그램으로 지난해까지 베트남과 미얀마 등지에서 1000여명을 배출했다.

김 전 회장은 1980년 국내 기초학술진흥사업에 써 달라며 대우재단에 200억원을 내 놓으며 “나는 버는 재주는 있으나 쓰는 재주는 없으니 도움이 되는 곳에 써 달라”라는 말은 알려진 비화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유족은 부인 정희자 전 힐튼호텔 회장, 장남 김선협 (주)아도니스 부회장, 차남 김선용 ㈜벤티지홀딩스 대표, 장녀 김선정 (재)광주비엔날레 대표 이사 등이 있다. 빈소는 아주대학교 장례식장 1호실이며 조문은 10일 오전 10시부터 가능하다. 영결식은 12일 오전 8시 아주대병원 별관 대강상에서 진행될 예정이며 장지는 충남 태안군 소재 선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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