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 시인·한강 작가의 목소리, 빛글씨로 흐르다
김혜순 시인·한강 작가의 목소리, 빛글씨로 흐르다
  • 김진수 기자
  • 승인 2019.12.11 21:42
  • 수정 2019-12-11 21: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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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하여: 제니 홀저’전
국립현대미술관 2020년 7월 5일까지
텍스트 로봇 LED 사인 전시
경구 격언 담긴 포스터 1000여장도
국립현대미술관 지하 서울박스에서 열리고 있는 ‘당신을 위하여: 제니 홀저’전의 작품 '당신을 위하여'. 16m 높이 천장에 달려 있는 LED 사인에서는 김혜순, 한강 등 국내외 여성 작가 5명이 쓴 텍스트가 나온다.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지하 서울박스에서 열리고 있는 ‘당신을 위하여: 제니 홀저’전의 작품 중 ‘당신을 위하여, 2019, 로봇 LED 사인, 640.1 x 12.7 x 12.7 cm.’ 16m 높이 천장에 달려 있는 LED 사인에서는 김혜순, 한강 등 국내외 여성 작가 5명이 쓴 텍스트가 나온다. ⓒ국립현대미술관

 

“비 내리는 동물원 /철창을 따라 걷고 있었다 / 어린 고라니들이 나무 아래 비를 피해 노는 동안 / 조금 떨어져서 지켜보는 어미 고라니가 있었다 /사람 엄마와 아이들이 꼭 그렇게 하듯이 / 아직 광장에 비가 뿌릴 때 / 살해된 아이들의 이름을 수놓은 / 흰 머릿수건을 쓴 여자들이 / 느린 걸음으로 행진하고 있었다”(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중 ‘거울 저편의 겨울 11’)

무엇을 전시하는 곳인지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로 바닥에 아무런 전시 작품이 없는 넓고 거대한 공간에 6m가 넘는 LED 막대가 빛을 내며 천장에 매달려 있다. 텍스트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간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지하 1층 서울박스에서 열리고 있는 서양화가 제니 홀저(69·미국) 작가의 ‘당신을 위하여: 제니 홀저’전의 ‘당신을 위하여’라는 작품이다. 소설가 한강, 작가 김혜순, 재미 한인 작가 에밀리 정민 윤, 벨라루스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터키 작가 호진 아지즈 5명의 여성 문학 작가의 작품에서 발췌한 글이 로봇 LED 사인 화면에 담겼다. 전쟁의 폭력이나 정치적 억압 세월호 참사 같은 국가적 재난 때문에 인권을 유린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한강의 ‘거울 저편의 겨울 11’, 김혜순의 ‘죽음의 자서전’ 등에서 발췌했다.

홀저 작가는 사회적 맥락이 담긴 텍스트 위주로 작업을 해왔다. 1980년대에는 LED 디스플레이에 관심을 보였고 뉴욕 타임스퀘어 거대한 전광판 위에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지켜줘”(PROTECT ME FROM WHAT I WANT), "권력의 남용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ABUSE OF POWER COMES AS NO SURPRISE) 등의 문구를 띄워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1990년대부터는 문학 작가들의 시와 산문을 차용한 작품을 제작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에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관련된 기밀 해제 정부 문서, 전쟁 참가 병사들의 증언을 작품 텍스트로 사용했다.

국내 전시 한국 사회의 맥락을 작품에 담고 싶었던 홀저 작가는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채식주의자』 등을 읽었다. 작품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여성 작가들의 글을 담기로 했다. 다섯 작가 작품의 텍스트는 LED 화면에서 쉬지 않고 올라간다. 작품에 따라 텍스트는 주황빛을 띠거나 파란빛을 내기도 한다. LED 막대도 작품에 따라 16m에 가까운 천장 근처까지 올라갔다가 아래로 내려오기도 한다.

제니 홀저의 작품 ‘경구들(1977–79)로부터, 선동적 에세이(1979–82)로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설치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제니 홀저의 작품 ‘경구들(1977–79)로부터, 선동적 에세이(1979–82)로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설치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이현주 학예연구사는 “텍스트들에 폭발적인 의미가 담겨 있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글은 아니다”라며 “관객들에게 더 강렬하게 보여주거나 혹은 차분하게 보여주기 위한 방식”이라고 했다. 이어 “소설이나 시에서 역사의 뒤편에 가려져 있던 여성들의 증언이나 진실된 목소리를 급진적인 변화가 가능한 예술공간에서 미학적이고 강렬한 텍스트를 통해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하게 하고 싶었다”고 했다.

서울관에서는 홀저 작가의 ‘경구들’과 ‘선동적 에세이’도 함께 전시되고 있다. ‘경구들’은 ‘경구들’ 시리즈에서 발췌한 문장 240개를 인쇄한 포스터로 이뤄져 있다. 포스터에는 경구와 격언, 상투적인 문구를 담았다. ‘선동적 에세이’는 각각 100개의 단어로 이뤄진 에세이 컬렉션이다. 각 글은 선언문처럼 단호하고 특정한 입장을 지지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1층 로비 한쪽 벽면에 두 작품 합쳐 1000장이 넘게 설치돼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야외 석조다리 위에는 홀저 작가가 ‘경구들’에서 선정한 11개의 문구를 영구적으로 새긴 작품을 전시한다. 2020년 7월5일까지. 문의는 02-3701-9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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