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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향미>

내 비록 나이 드는 것을 밝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지만, 요즘처럼 사오정(45세 정년)이니 오륙도(56세까지 일하면 도둑)니 하는 소리를 들을 때면 걱정스럽다 못해 무력감마저 들 정도이다. "오렌지를 먹고 껍질을 버리듯이 대할 수는 없어. 사람은 과일이 아니란 말이야" 라고 절규하던 세일즈맨의 죽음이 이제 더 이상 그 시대 미국만의 얘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수십 명의 조기퇴직자를 만나본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이들의 딱한 사정이 정말 남의 일 같지가 않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특별한 흠이나 잘못 없이 퇴직해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한창 일할 나이에 업무능력보다는 단지 연령이 많다는(사실은 결코 많지도 않지만) 이유만으로 부당하게 퇴직해야 했던 이들의 어려움과 마음고생이 얼마나 클지는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들의 문제가 구조적인 데 있느니 만큼 임금피크제 도입이나 연령차별 금지를 명시하는 법 제정 등을 통한 제도적 개선이 하루 빨리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런 식의 제도적 개선책에 관한 사항이 아니다. 내가 이들을 만나면서 정말 안타까웠던 것은 이들 대부분이 ‘조직맨’(사실은 ‘조직퍼슨’이라고 해야 옳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은 남자들이 대부분이다)이었다는 점이다. 특히 명문대학을 나오고 거의 전 생애를 한 직장에서만 보냈던 사람들일수록 조직맨일 가능성이 더 높은 것처럼 보였다.

이 조직맨들은 회사에 충성하면 회사도 나에게 신의로 보답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자신과 조직간의 관계는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조직의 성공이 곧 개인의 성공이라고 생각하면서 조직에 열과 성을 다 바쳤다.

그러나, 이렇게 오래 조직맨으로 살아오면서 이들은 혼자서 독창적으로 일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즉 조직이 시키는 일은 잘했지만, 자기 혼자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아니 무슨 일을 해야 할지조차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퇴직자에게 새로운 직장을 찾도록 지원해주는 전직(轉職) 컨설팅 담당자의 얘기로는, 명문대학 나오고 좋은 직장에서 승진을 거듭했던 퇴직자라도 “가장 자신 있는 분야가 무엇인가?” 라고 물으면, 대부분 “없다” 혹은 “모른다” 라고 대답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일을 찾기 위해서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 기본이다. 내 역량을 스스로 파악하여 강점을 이용하는 전략을 펼쳐야 일자리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퇴직자들이 자신의 강점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아마 이들은 지금이라도 누가 일을 시키면 밤을 새워서라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하기는 힘들다.

게다가 이들은 지독히 타인지향적이다. 자기 자신보다는(그리고 가족보다는) 상사나 동료집단이 모든 것의 척도였다. 심지어 즐거움을 찾는 일에서조차 그러했다. 대학 졸업 직후부터 32년을 한 은행에서 일했던 Y씨는 일생 동안 일만 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취미도 없으며, 그렇다고 종교를 갖기에는 지나치게 합리적이라고 자신을 설명하였다. 그는 하루를 보내기가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이 대단했다. 그러나 시간도 많으니 책 읽는 데 취미를 붙이면 어떻겠냐는 내 제안에 대해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오히려 은행 다닐 때 책도 더 많이 읽었지요. 하지만 이제는 이런 책 읽었다고 자랑할 동료도 없고, 이러이러한 책이 좋던데 너희들도 한번 읽어보라며, 으스대며 권할 부하직원도 없으니…. 책 읽는 재미가 싹 사라졌어요.”

이쯤에서 밝혀야겠다. 사실 이 문제는 조기퇴직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를 포함하여 어려서부터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진 우리 모두의 문제가 아닐까? 이들을 만나면서 나는 나를 포함하여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약점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조직이나 집단의 논리에 길들여진 우리는 어쩌면 자아마저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드러커(P. Drucker)의 지적대로 평균수명이 늘어남에 따라 우리 대부분은 조직보다 오래 살 것이다. 근로자들은 웬만한 회사보다 오래 일할 것이며, 개인들은 한 가지 이상의 여러 직업을 가질 준비를 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답은 결국, 자신을 다시 찾는 일이다. 즉 조직 속에 파묻힌 나를 찾는 일이 중요하다. 이제 누가 당신을 알아주겠는가. 바로 당신 자신이다. 바로 당신이 당신 자신을 수면 위로 부각시켜야 한다. 이제는 당신의 사회생활이 당신에게 달려 있는 시대이다. 라이시(Robert B. Reich)의 말대로, 명문대 졸업장보다는 적극적인 자세와 창조력이 필요하며, 각 개인은 자신이 속한 조직 내에서가 아니라 자신의 분야에서 이름을 알리면서 앞길을 헤쳐 나가야 한다.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말기 바란다. 조직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개인의 성공을 위해서 조직을 이용만 해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니까. 조직은 여전히 중요하다. 또 개인이 이용만 하게 내버려두는 호락호락한 조직은 오래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보다는 자기 자신이라는 회사를 위해 일함으로써 자신의 직장에도 도움이 되려는 자세가 중요하지 않을까?

또한 모든 사람의 인정을 받는 타인지향적인 인간이 아니라, 자부심을 갖는 개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자부심이란 내가 남들보다 우수하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다. 사실 나에 대해 알면 알수록 내가 얼마나 아는 것이 없는지 깨닫게 된다. 그보다는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독특한 것을 발견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과정과 함께, 인생의 험난한 여정을 헤쳐 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계속 발전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한혜경/ 호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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