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이혜경 한국여성재단 이사장
1999년 세워진 1호 공익재단법인
진영 구분 없이 여성들 손 맞잡아
20년간 시민·기업 509억원 기부
“투명성·공정성 바탕으로
신뢰받는 시민사회 조직될 것”

이혜경 한국여성재단 이사장의 왼쪽 가슴에는 늘 여성재단을 상징하는 ‘W’ 브로치가 반짝인다. 여성과 남성의 옆 모습이 새겨져 있는 브로치는 성평등 사회를 향해 여성과 남성이 함께 하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 ©차윤회 객원 사진기자

 

한국 시민사회 최초의 공익재단인 한국여성재단이 올해 출범 20주년을 맞았다. 여성재단은 1999년 12월 6일 전국 124개 여성단체와 13개 지역네트워크가 모은 기금으로 탄생했다. ‘딸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여성들이 차별받지 않고 마음껏 잠재력을 펼치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시민사회가 정파성과 이념성을 초월해 한 마음으로 손을 잡았다.

이혜경(71) 여성재단 이사장은 재단 탄생 그 자체가 “한국 여성사의 위대한 영웅들이 일궈낸 기적같은 성취”라고 평했다. 한국의 여성운동은 75년 유엔(UN)의 ‘세계 여성의 해’ 지정, 82년 이화여대 여성학 개설, 95년 베이지여성대회를 거치며 틀을 갖춰갔다. 특히 87년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이 여성단체를 만들기 시작했고 시민운동이 전성기를 맞은 90년대 후반 여성재단의 필요성이 커졌다.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여성단체 활동가와 재정난에 시달리는 여성단체의 지속가능한 활동을 위해서다. 박영숙 초대 이사장이 윤후정 전 이화학당 이사장을 찾아가 “여성들과 여성단체들을 받쳐줄 수 있는 재단을 만들고 싶다. 같이 하자”고 제안한 것이 여성재단의 시작이다. 빈 손으로 시작했으나 한국여성기금추진 발기인대회를 결성한 뒤 김대중 대통령 부인인 이희호 여사가 명예위원장으로 참여하고 학계·법조계·종교계·언론계도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16억원을 모은 여성들은 마침내 한국여성재단을 설립했다.

“한국여성재단은 여성운동의 중간 성과예요. 여성단체들이 기금을 모아 재단을 만드는 일은 전례 없는 일이거든요. 1950년대 시작된 가족법 개정운동이 2004년 성공을 거둘때 까지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 여성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었어요. 그 안에서 여성재단이 만들어졌죠. 현장의 다양한 분파가 한데 모인 여성재단은 언제라도 뭉쳐야 한다는 주장을 할 수 있는 정통성을 갖는 다는 점에서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20년간 시민 7만3915명 기부 참여

이 이사장은 대통령자문 양극화민생대책위원장, 빈부격차 차별시정위원장을 지낸 사회복지 전문가로 젠더와 복지의 연관성을 연구해왔다.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대에서 사회사업학 석사, 버클리대에서 사회복지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32년간 이화여대와 연세대에서 제자들을 길러왔다. 이후 박영숙 초대 이사장과 조형 2대 이사장의 뒤를 이어 2015년부터 여성재단을 이끌고 있다. 이 이사장은 지난 5년이 “1년이 하루처럼 지나갔다”고 했다.

“모금액을 토대로 배분만 하는 많은 재단과는 달리 여성재단은 모금도 하고 사업도 개발하고, 파트너단체들의 역량도 강화하는 커뮤니티 재단(community foundation)이에요. 기부자와 파트너단체들을 사업으로 연결해 나눔과 성평등 문화를 확산하며 여성운동의 방향을 이끄는 역할도 합니다. 다양한 일을 하다 보니 5년이라는 시간이 정말 빨리 흘러갔어요.”

지난 20년간 여성재단이 모금한 금액은 약 509억원에 달한다. 이 가운데 93억원은 7만3915명의 개인 기부자가 십시일반 보내왔다. 여성재단은 모금액을 토대로 1605개 지원사업을 벌였고 5373개 단체를 지원했다. 성평등 사회를 구현하는 여성운동을 지지하고 장애여성, 여성폭력 피해자, 빈곤여성을 지원하고, 양육미혼모와 한부모 가정, 이주여성 등을 도왔다. 

“미혼모를 돕겠다고 사업 제안서를 내면 기업들은 퇴짜를 놓을 때가 많았어요. 미혼모는 ‘부도덕하다’는 인식 때문이었죠. 그 때 나타난 인물이 미국인 리처드 보아스 박사입니다. 안과의사인 보아스 박사는 한국 미혼모의 아이를 입양한 양부모였는데, 그는 입양한 딸로 인해 자신이 누린 행복에 대해 보답하고 싶은 마음에 한국을 방문했다가 미혼모들이 친권을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열악한 현실을 목격하고 여성재단에 기금을 내놨어요. 그 기금을 씨앗으로 한국미혼모가족협회가 만들어지고 양육미혼모 당사자가 목소리를 내는 환경을 만들었어요. 지금은 미혼모가 아이를 키울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사회가 함께 나서고 있죠.”

딸들에게 더 많은 희망을

“우리 딸들의 밝은 새천년을 연다”는 기치로 문을 연 여성재단이 스무 살을 맞는 동안 한국 여성운동과 여성단체는 변화 속에 ‘전환기’를 맞았다. 호주제가 폐지되고 여성가족부가 설치되고, 여성의 의회진출이 늘고, 성인지 예산제도가 도입됐으나 성별 임금격차는 OECD 국가 중 가장 크고, 성권한척도 등 지표상 한국 여성의 지위는 여전히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페미니즘은 대중 속으로 스며들었고 미투 운동이 확산되고 불법촬영에 문제제기 하는 여성들이 거리로 쏟아졌고 페미니즘 운동의 새 흐름과 그 안에서 페미니스트들이 겪는 고민도 커졌다.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시(반발)는 더욱 격렬해졌다. 여성운동을 지원하는 여성재단은 엄청난 변화 속에서 더욱 다양한 목소리를 담고 지원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이 이사장은 “여성재단이 소외계층 여성의 ‘비빌 언덕’이자 성평등 사회를 일구는 여성들에게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믿음직한 버팀목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여성재단은 20년간 모금과 배분의 투명성과 공정성에 관한 한 신뢰받는 시민사회의 조직으로서 모범을 보이고 싶습니다. 본격적인 디지털 혁명 시대, 격차의 심화, 문화적 다양성의 확산, 가족과 돌봄 형태의 변화 등 인류문명의 패러다임적 전환의 새로운 시대에 여성재단은 새로운 통합과 포용,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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