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경 칼럼] 국화빵
[정진경 칼럼] 국화빵
  • 정진경
  • 승인 2019.11.29 07:45
  • 수정 2019-11-28 23: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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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닿는 맑고 차가운 초겨울 공기를 즐기며 동네 산기슭을 슬슬 산책하니 상쾌하다. 한참 다니다 보니 손이 아릿아릿 시리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파트 단지 입구에 국화빵 장수가 와 있다. 국화빵 먹어본 게 언제더라? 늦은 오후 출출하기도 하고, 사들고 가면 손도 따듯하겠다 싶어 다가갔다. 팻말에 쓰여 있기를 '2000원에 10개.' 천원어치만 팔면 좋겠는데. 국화빵이란 자고로 샀을 때 바로 다 먹어야 하는데. 하지만 그 아저씨도 장사에 나름의 원칙이 있을 테니까 그냥 샀다.

돌아서는데 초등학교 1, 2학년 또래의 꼬마 셋이 국화빵 장수에게 다가왔다. 산에서 실컷 놀다온 모양으로, 눈은 반짝이고 얼굴은 빨갛고 신발은 흙투성이다. 학원가방도 없이 마음껏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라 이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신기했다. "아저씨, 이백원에 한 개 주세요." 아이구, 요 귀여운 녀석들! 이 엉뚱한 거래 제안을 아저씨가 과연 들어 줄 것인지 궁금해서 나는 어물어물 그 옆에 서있었다. 아니, 준들 국화빵 한 개를 가지고 셋이서 어쩌려고? 아저씨는 잠시 난감한 얼굴을 하더니, "그렇게는 안 팔아" 한다. 아이들은 적잖이 실망하는 눈치다. 나는 아저씨의 원칙이 좀 야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재미 삼아 한 개를 팔아도 될 터인데. 손해가 나는 것도 아니고. 

귀여운 꼬마들을 실망시킨 아저씨의 이유 없는 원칙주의가 마음에 들지 않아 내가 말했다. "할머니가 한 개씩 줄께." 봉지입구를 조금 찢어서 아이들에게 내밀었다. 어차피 내가 열 개를 다 먹을 것도 아니니까 뭐. 아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며, "정말요?" 하고 합창을 한다. 그 표정이 무슨 관세음보살이라도 만난 것 같이 경탄으로 가득 차 있다. 꾀죄죄한 손들이 봉지를 들락날락하면서 국화빵을 하나씩 집어냈다. "감사합니다!" 또 합창을 하더니, 국화빵을 오물거리며 팔짝팔짝 뛰어갔다. 한 사람에게 200원어치씩 인심 쓰고 이렇게 대단한 경탄과 감사를 받은 것은 아마도 세상에 나밖에 없을 것이다.

아이들의 그 표정과 손에 전해지는 따끈한 국화빵의 온기를 즐기며 실없이 웃음을 머금고 집으로 들어오는데, 아파트 경비아저씨가 어디 갔다 오냐고 하신다. 아저씨가 내게 늘 하는 이 말은 그냥 친근한 인사일 뿐, 진짜로 어디를 갔다 왔는지는 별 관심이 없다. "요 앞에요. 국화빵 드세요. 따듯해요." "아이구, 이거 오래간만에 반갑네요." 세 개를 덜어드렸다. 집에 들어와 나머지 네 개를 먹었다. 맛있었지만 저녁때가 가까운데 좀 많은 듯 싶었다. 

며칠 후,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집 '금아문선(琴兒文選)'을 읽는데, '장미'라는 글이 있었다. 젊은 시절, 선생님이 장미 일곱 송이를 사서 집으로 가는 길에 아는 사람을 만났다. 앓는 부인께 드리라고 두 송이를 주었다. 전차를 타고 가다가 친구 생각이 나서 빈 하숙집에 들러 두 송이를 꽂아 주었다. 남은 세 송이의 장미가 시들세라 빨리 걸어가는데, 또 아는 사람을 만났다. 애인 만나러 간다며 꽃을 탐내는 것 같아, 남은 장미를 다 주어버렸다. 다 주고 싶어서 주었지만 장미 한 송이도 없는 것이 서운하다고 글은 끝난다.
읽고 나니 부끄럽다. 그 때 아이들에게 왜 두 개씩 주지 못했을까? 이 나이에 아직도 넉넉한 할머니가 되지 못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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