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눌린 거시기, 무대 위에서 뻥 뚫리다
억눌린 거시기, 무대 위에서 뻥 뚫리다
  • 김효선 기자
  • 승인 2019.11.26 13:47
  • 수정 2019-11-26 13: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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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미 표 해방미학
‘거시기 모놀로그’를 보고
‘빨래 다라이’ 속 피 칠갑 땐스,
괴상한데 통쾌한 이 느낌, 뭐지?
ⓒ안은미컴퍼니
ⓒ안은미컴퍼니

막춤에 북한춤 재현까지, 무대 마다 파격을 던졌던 현대무용가 안은미가 이번에 택한 파격은 할머니들의 ‘거시기’ 경험에서 시작한다.

여성들에게 섹스의 체험이란 어떤 걸까? 무대는 70대 이상 할머니들이 기억하는 ‘첫 날 밤’에 대한 구술로 시작한다. 몰랐고, 당했고, 아팠고, 끔찍했고, 도망치려 했으나 뱃속에 아이가 있었고, 세상 다 그러려니 하고 살았고, 아이가 셋이 되었고…. 무미건조한, 무성적인, 박제화된 스토리가 무심한 자막, 무심한 목소리로 나타난다.

섹스가 자기 결정권이라거나 하는 이야기는 어림없던 시대, 어이없게 슬픈 고백. 그러나 할머니들의 건조한 고백은 안은미의 무대에서 목소리로 말로 살아났고, 몸으로 살아났고, 스토리를 얻어서 살아났다.

공연에서 ‘빨래’가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한다. 첫 장면에서 이불 호청 같은 하얀 천이 빨래 줄에 널린 듯 바람결에 펄럭이며 관객의 시선을 잡는다. 만장같이 휘날리는 하얀 천 가운데 빨간 활옷을 입고 걸어 들어가는 여자가 있다. 시집가는 그 여자. 그 여자 위로 쏟아지는 억압의 기억들. 구술로 들려나오는 목소리 가운데는 월경대 빨래도 있다. 아무도 안볼 때 빨아서 어두컴컴한 구석에서 말려야 했던 그 기억들. 여성의 피는 그렇게 불경했을까?

ⓒ안은미컴퍼니
ⓒ안은미컴퍼니

시집 간 첫날 밤 처음 신랑 얼굴을 봤다거나, 신랑의 나신을 보고 기절했다거나, 통증을 못 이겨 죽고 싶었다는 이야기들…. 이런 이야기를 무용수들이 받아내는 과정은 빨래의 제의 같다. 바닥에 부딪치고, 깨지고, 할머니의 구술을 연기하는 무용수들은 남성들이다. 젠더프리(Gender-free) 안무는 여성들의 아픈 경험을 훨씬 더 객관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였다.

드디어 ‘빨래통 땐스’의 등장. 안은미는 색동의 수영복에 반라의 몸으로 빨래통에 들어가, 그 모든 기억의 얼룩을 확실하게 빨아낸다. 할머니들의 거시기 모놀로그를 끌어당겨서 몸으로 새기고, 집어삼키는 열정적인 안무는 괴상하기도 했지만 통쾌하고 따뜻했다. 문자로 박제화됐던 거시기함을 박살내고, 생명의 불씨를 살려내 끌어안는다. 마침내 안은미는 빨래통 안에서 핏빛 천을 끌어내 머리 위에서 짜낸다. 붉은 피를 얼굴에 바르며 춤추는 안은미는 새로운 이야기가, 새로운 생명의 몸이 시작되는 페스티벌을 온 몸으로 펼쳐낸다. 거시기가 참 거시기 했던 처음과 달리, 축제의 거시기는 에너지를 선물하며 막을 내린다.

 

무용가 안은미. ⓒ안은미컴퍼니
무용가 안은미. ⓒ안은미컴퍼니

이번에도 안은미의 파격은 진지하고, 격정적이었다. 안은미의 이런 공연에 대해서 큐레이터 현시원은 ‘안은미 표 해방미학’, ‘한국의 언어와 몸동작의 관습을 뚫어버리는 뻥력’이라고 적절하게 표현한다. 말해지지 않고 들리지 않는 여성의 경험들은 거시기 말고도 얼마나 더 많은가! 21세기에도 여전히 귀엣말로, 뒷방 수다로만 남아있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온 몸으로 전달하며 구속감을 뻥 뚫어주는 안은미가 펼쳐갈 신나는 몸의 세계를 기대한다.

*안은미의 ‘거시기 모놀로그’는 11월22~24일 서울 영등포아트홀에서 공연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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