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성과 정직함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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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주는 죽음으로 ‘말하고’ 싶어했다,

아니 ‘말하고 싶었으나 말하지

못했음을 말하고’ 싶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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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열성과 정직함의 시인 이연주

1991년에 시인이 됨. 1992년 자살로 생을 마감함. 시집 두 권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 <속죄양, 유다>(유고시집). 기지촌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지켜보았던 매춘여성들의 삶에 적극적으로 동화된 태도로 글을 써나갔던 시인 이연주를 시인 김정란 교수가 추억한다. 자신의 여성적 정체성을 분명하게 자각했던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치열성과 정직함으로 인하여 저절로 여성적 정체성의 추구라는 문을 향해 걸어갔던 여자. 죽음에 이르도록 간절하게 시인 이연주가 말하고 싶어했던 것은 무엇일까?

나는 시인 이연주를 만나본 적이 없다, 아니, 있다. 어쩌면, 어떤 종류의 질서 안에서는 현실보다도 더 현실적으로. 그녀가 나를 불렀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그녀를 불렀던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아마도, 아주 먼 갤럭시, 시간 속에서 자유로워질 다른 갤럭시 안에서는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 지혜가 내 머리를 꽃처럼 장식할 어떤 다른 갤럭시에서는. 짧은 두 번의 만남. 현실 속의 만남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 두 번의 만남을 감히 아무런 수식어 없이 만남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나는 그녀를 정말로 만났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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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호의 ‘구두’. 피곤에 지쳐 너덜너덜 떨어진 구두 두짝이 이연주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른다.

언젠가, 그녀의 시에 대한 아주 짧은 리뷰를 쓴 적이 있다. 부글부글 끓는 에너지의 덩어리같다는 생각, 그러나 그것이 매우 부정적인 양식으로만 표출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 대충 그런 막연한 기억밖에는 그 원고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 없다. 그런데, 지금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모르는 그 원고에 대해 내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내가 이연주가 사용했던 아주 이상한 쉼표 하나를 매우 불안해하며 언급했었다는 사실이다.

그 쉼표는 적절한 맥락을 찾지 못하고, 맥락을 끊어먹거나, 맥락들 위에 위태하게 걸터앉아서 마치, 호흡곤란을 호소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그 쉼표가 내 마음에 의문부호처럼 걸린다, 라고 썼었던 것 같다. 그리고, 무슨 연유에서인지 모르지만, 그 글과 함께 고호의 그림 ‘구두’가 동시에 어김없이 떠오른다.

그 그림이 삽화로 사용되었었나? 그러나 그 문학지 편집에 삽화나 이미지가 들어갔던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허공을 향해, 호흡이 곤란하다는 듯, 입을 떡 벌리고 있던 그 쉼표와, 고호의 피곤에 지쳐 너덜너덜 떨어진 구두 두 짝이 이연주를 생각할 때마다 내 가슴에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나는 그 글이 발표되고 나서 얼마 있다가 이연주의 자살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쉼표가 갈고리처럼 내 몸 어디엔가에 박혔다.

그리고 또 한번의 만남. 어느 날이었던가. 나는 낮에 깜빡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낮에 깜빡 잠들었다가, 꿈에서 죽은 이연주를 보았다. 그녀 생전에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데도. 세계사 시집 표지에 난 사진 그대로였지만, 통통하고 밝아보였다. 행복한 新婦 같았다. 머리에 커다란 진주 나비 장식을 달고 있었다. 그녀가 안녕? 하고 인사했다. 내가 안녕!하고 인사했다. 그녀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선생님, 내 가슴 속에 철사로 된 빽빽한 말 다발이 들어 있었어요. 그걸 풀어내야 했어요. 그게 날 죽였어요.

-김정란, <낮꿈>, 부분

죽은 이연주가 내 꿈 속에서 “철사로 된 빽빽한 말다발”이라고 말하던 모습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꿈 속에서 내가 “이 말은 대단히 중요해. 반드시 기억해야 해”라고 생각했던 것도 기억난다. 꿈에서 깨어나 나는 한참 동안 가슴을 누르고 있어야 했다. 마치, 그 철사 말다발이 정말로 내 몸을 안으로부터 쿡쿡 찔러대는 것 같았다. 명치끝이 오랫동안 찌르듯이 아팠었다.

그리고 나는 오랫동안 울었다. 내 울음이 저승까지 이르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너를 위해서 내가 잘 말할 수 있을까? 허공에 목을 매달아 버린 네 잘린 말 대신? 죽음 안으로 몸을 던진 네 철사 말다발의 절망을 내가 이윽고 가닥가닥 한 올씩 풀어내어 나뭇잎처럼 순하고 아름다운 말의 희망으로 바꾸어 낼 수 있을까? 내 몸 속으로 들어온 네 저승의 전언을 내가 세상 사람들의 귓바퀴 가까이 가져갈 수 있을까? 절망은 여전히 내 가슴을 뻑뻑하게 짓누른다. 세상은 여전히 완강하고 나는 여전히 무력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내 명치끝은 찌르듯이 아프다.

이연주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1953년생. 수간호사. 1991년에 시인이 됨. 1992년 자살로 생을 마감함. 시집 두 권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 <속죄양, 유다>(유고시집). 그리고 여성문인들을 따라다니는 심술궂은 소문들. 남성문인들은 물론이고 여성문인들까지 나서서 입을 쫑끗대며 큰일이나 났다는 듯이, 자신들은 모든 궂은 일과는 무관한 왕자마마 공주마마라는 듯이, 새삼스럽게 엄숙한 표정을 짓고, 죽은 자마저도 마음놓고 씹어제끼며 스캔들을 만들어내는 그 가공할 우아한 무책임한 이빨들. 속물들의 말잔치. 그것이 전부다.

나는 그들의 말을 한 마디도 귀기울여 듣지 않는다. 그 말들에는 최소한의 애정도 삶에 대한 진지한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이연주가 1991년 첫 시집을 출판한 다음해인 1992년에 느닷없이 자살한 이유는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자신의 육체에 스스로 죽음을 집행한 자 말고 누가 그 죽음의 이유에 대해 알 수 있다는 말인가? 심지어 죽은 자 자신도 진정한 이유는 모를지도 모른다. 모든 죽음은 미스터리이다. 100살 넘어 자연사한 사람의 죽음도 본질적으로는 미스터리이다. 나는 다만 이연주가 죽음으로 ‘말하고’ 싶어했다는 것을 마음에 접어둘 뿐이다, 아니다, ‘말하고 싶었으나 말하지 못했음을 말하고’ 싶어했다는 것을 짚어둘 뿐이다, 죽음에 이르도록 간절하게.

그녀의 시세계는 어둡고 눅눅하다. 그곳에는 좀벌레가 들끓고, 악몽은 끊임없이 이어지며, 무엇 때문에 사는지 알 수 없는 매음녀들의 너덜너덜 해어진 육체들이 있다. 이연주 시의 이러한 부정적 특성에 대해 한 평론가는 ‘위악적’이라는 표지를 붙였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단순한 ‘위악’을 넘어선다. 그것은 차라리 치열성의 증거이다. 그녀의 시는 일체의 낭만적 환상을 거부한 채, 가부장제적/자본주의적 ‘위선’의 복판을 겨눈다. ‘위악’은 ‘위선’에 대한 소극적/냉소적 뒤집기에 불과하다. 아니, 이연주는 위악적이지 않다.

그녀는 그녀가 기지촌에서 간호사로 일하면서 지켜보았던 매춘여성들의 삶에 진짜로 정말로 적극적으로 동화된 태도로 글을 써나갔기 때문이다. 이연주는 단순히 ‘그녀들’을 동정하거나, ‘그녀들’의 비참을 보고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는다. 그녀는 정말로 ‘그녀들’이 된다. 아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 그녀는 ‘그녀들의 육체들’이 된다. 얻어맞고 착취당하고 파먹히고 그리고 피를 빨린 뒤에 도시의 하수구에 내던져지는 혼이 없는 살주머니. 그 육체들은 욕망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일 뿐이다. 이연주는 그 육체들에 완전히 동화되어 있었다. 그녀의 시적 자아는 스스로 매음녀가 되어 생의 바닥을 지렁이처럼 기어간다.

‘그녀들’과 ‘그녀들의 육체’를 치료하는 간호사 사이에는 아무런 거리도 없다. 이연주는 ‘그녀들’의 육체와 함께, ‘그녀들’의 육체 안에서 분노하고 절규한다. 남성들의 욕망의 쓰레기통, 야금야금 파먹힌 뒤에 썩어서 ‘검은 간장’처럼 되어 버리는 수동적 객체. 가부장제의 허울좋은 일부일처제가 만들어놓은 제도의 허깨비들. 기생하면서 기생당하는 두 겹의 소외. 이연주는 그럴 바에는 차라리 한꺼번에 잡아먹으라고 절규한다.

차라리 내 간을 빼어 먹어요

그렇게 야금야금

살점 뜯어먹고 새살 나기 기다리고

아이, 그렇게 말고

단숨에 큭, 심장 할켜버려요

쿨럭쿨럭 솟구치는 피를 다

빨리 마셔 치워줘요

- <백치여인의 노래>, 부분

흡혈귀들은 무자비하고 잔인하다. 가부장적 흡혈귀들 앞에 던져진 매음녀들, 자본의 시장에 내걸린 고깃덩어리들은 매일 세계의 벼랑으로 떠밀린다. 삶은, 아무, 의미도 없다.

한번의 잠자리 끝에

이렇게 살 바엔…

왜 살아야 하는지 그녀도 모른다.

쥐새끼들이 천장을 갉아댄다.

바퀴벌레들과 옴벌레들이 옷가지들 속에서

자유롭게 죽어 가거나 알을 깐다.

흐트러진 이부자리를 들추고 그녀는 매일 아침

자신의 시신을 내다버린다, 무서울 것이 없어져 버린 세상.

철근 뒤에 숨어사는 날짐승들이

그 시신을 먹는다. -<매음녀1>, 부분

이연주의 독창성은 그녀가 여성적 소외의 극한점으로 존재하는 매음녀들의 조건이 도시로 대표되는 자본주의적/가부장적 문명의 숨겨진 잔인한 얼굴이라는 것을 파악했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매음녀’는 도시의, ‘철근 뒤’의 ‘시장’과 함께 떠올려진다. 그녀의 비참은 상품화된, 사물화된 육체의 비참이다. 그 비참의 근원에는 아버지-페니스의 무한정한 욕망의 추구가 있다. 페니스의 질주하는 욕망의 바퀴 아래에서 매음녀들의 존재는 단지 성기에 불과한 것으로 축소된다. ‘세모 여자’. 물질화한 아프로디테의 印章. ‘비인칭의 엔트로피’.

이연주는 기지촌 여성들의 육체로부터 말을 끌어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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