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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메리칸 사이코> 속 사이코는 한 순간 확 돈다. 그를 미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명함이다. 친구(인 척 하는 작자)들이 내미는 명함 때문이었다. 이미 아는 사이에 무슨 명함? 그건 그냥 명함이 아니다. 신분 증명서다. 라이벌이 건넨 명함엔 금박을 입힌 글씨가 고급스러운 종이에 얌전히 박혀있다. 부르르 떠는 패트릭. 속으로 되뇌인다. 금을 입혔잖아?

명함이 단지 연락처를 적은 종이에 불과하던 시절은 오래 전에 갔다. 정보 전달의 무미 건조를 넘어, 디자인이 멋진 명함을 넘어, 명함 하나로 자기 표현을 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사진을 찍는 김명미씨 명함은 한 번 보면 잊혀지지 않는다. 패션이나 디자인과 친한 포토그래퍼들의 명함이 스타일리시한 것은 오래 됐다. 더구나 요즘 너도나도 자기 명함에 사진을 박는 유행도 유행이지만, 이건 그냥 멋진 사진 정도가 아니다. 한쪽 가슴은 손을 들어 가렸지만, 한쪽 가슴은 유두까지 고스란히 보인다. 그리고 손목 위에 박힌 독특한 타투. 김명미씨 명함엔 다 뜻이 있다. “가끔 사람들이 오해를 하긴 하는데, 사실 내 사진은 아니다. 외국 잡지에 있는 모델 사진이다. 너무 좋아서 명함 사진으로 썼다. 그리고 그 여자를 따라, 나도 오른쪽 팔에 똑같은 타투를 해 넣었다. 타투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이 그림은 내 안에 좋은 끼를 발산하게 하는 무늬란다.”

더구나 김명미씨는 스튜디오 이름이 AMAZOS다. 아마조스. 물론 작명에도 이유가 있다. “아마조네스. 알지 않나? 정글에 있는 여인 천국. 가슴 한 쪽을 자르고, 외부로부터 남자들 침입을 막기 위해 싸우는 여인 왕국. 실제 AMA는 없다란 뜻이고 ZOS는 가슴이다. 가슴이 없다란 뜻이다. 나름대로 신선하고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치열한 사회를 살아나가는 여성이 떠올랐다. 남한테 굴하지 않고 나도 강하게 살며 작업하겠단 내 뜻이랑 맞다. 그래서 AMAZOS라 지었다.”

김명미씨와 달리, 실제 자기 사진을 실은 명함도 있다. 물론 옷을 벗고. 재미있는 파티를 기획하는 ‘쇼쇼’는 명함부터 재미있다. 멤버 세 명은 각자 명함에 자기 사진을 실었다. 다리, 가슴, 가슴과 다리까지, 각자 포지션이 틀리다. 특히 ‘쇼쇼’ 멤버이자 ‘BOGUEgirl’ 등의 패션지에 사진을 찍는 포토그래퍼 사이다씨는 가슴과 허벅지까지 세미누드다. 세미지만 어떻게 누드를 실을 생각을 했을까? 사이다씨는 별로 대단치 않다는 듯이 말했다. “명함은 어찌 보면 정보를 주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사진 찍고 그런 감성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다. 딱딱한 글자를 얹어 디자인한 명함은 좀 싫었다. 명함에도 내 사진을 넣고 싶었다. 그것도 나 자신을.”

포토그래퍼들이 자기가 찍은 사진을 넣은 명함은 별로 드물지 않다. 그런데 피사체가 아니라, 스스로 벗은 모습을 싣자면 꺼려지는 점은 없었을까? “없었다. 그건 단지 나의 사진일 뿐이다. 대체로 반응은 좋은 편이다. 가끔 내 명함을 받고 깜짝 놀라고 왜 이런 야한 사진을 넣었느냐는 사람을 만나긴 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비주얼적이고 감성적인 부분이 모자란 사람이다. 부정적으로 접했기 때문이다. 난, 한 번도 야하다고 생각한 적 없다.” 한데 이 명함은 특이한 점이 그뿐 아니다. 이 명함은 소위 접이식, 일명 폴더식이다. 본래 접힌 채로 받으면 다른 명함과 별로 다르지 않다. 얌전하고 심플한 흰 종이에 심플하게 찍힌 글씨. 하지만 펼치면 달라진다. 쇼킹하다. 한쪽엔 파리 에펠탑 등 풍경 사진이 얌전히 찍혀있지만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눈이 확 떠진다.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명함이다. “명함을 건네면 속은 못 보고 그대로 명함집에 넣는 사람도 있다. 물론 펼쳐주는 게 아니다. 그냥 준다. 못 보면 못 보는 거다. 접으면 우리 명함은 다른 명함과 똑같지만, 펼치면 달라진다. 마음을 오픈하면 볼 수 있단 그런 의미도 있다.”

이들과 달리 자신의 취향을 한 눈에 보여주는 명함도 있다. 일러스트레이터인 신동현씨 명함은 블라이스 인형 사진이다. 거기다 명함도 다 다르다. 명함마다 다른 블라이스 인형이 주인공. 심씨는 눈이 움직이는 특이한 인형 블라이스 마니아. 항상 블라이스 인형을 들고 다니면서 바뀌는 장소마다 블라이스의 사진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주느라 바쁘다.

단행본을 기획하고 각 매체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는 박사씨의 명함은 종이가 없다. 스탬프이기 때문. 명함을 내미는 대신 상대방 수첩을 달라고 해서 꾹 눌러찍어준다. 이들이 운영하는 웹사이트 <사탕발림>의 ‘레이지 노마드’란 꼭지 마냥 명함부터 부유하듯 떠돈다는 유목민족, 노마드족스럽다.

명함에 단지 정보를 담던 시대를 지나, 자기 캐릭터와 마인드를 담는 시대. 당신은 명함에 무얼 담고 있나?

조은미 기자cool@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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