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지휘자 안토니아 브리코
도전기 그린 영화 ‘더 컨덕터’ 14일 개봉
편견·무시 이겨내고 꿈 이루지만
여전히 현실의 벽은 커
국내 여성 첫 지휘자 김경희 교수
성시연·장한나 등 활약

안토니아 브리코(크리스탄 드 브루인)는 극 중에서 지휘자의 꿈을 이루지만 여전히 음악가들로부터 냉대를 받는다. ⓒ라이크콘텐츠
안토니아 브리코(크리스탄 드 브루인)는 극 중에서 지휘자의 꿈을 이루지만 여전히 음악가들로부터 냉대를 받는다. ⓒ라이크콘텐츠

왜 여성들이 꿈에 도전을 한다고 하면 주변에서 불가능하다고 여겼을까. 14일 개봉한 네덜란드 영화 ‘더 컨덕터’(감독 마리아 피터스)에서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기 위해서 전진하는 안토니아 브리코(크리스탄 드 브루인)의 모습을 보고 든 생각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한 세기 전인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당한 숱한 편견과 무시를 실력으로 걷어내고, 오로지 지휘자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은 브리코의 여정을 그렸다. 남성만이 지휘자에 오르고, 훌륭한 재능을 가진 여성 음악가조차 결혼하고 나면 평범한 주부가 되어버리는 시대. 새로운 역사에 도전하는 한 여성 지휘자의 위대한 이야기이다.

안토니아 브리코는 실제 인물로 캘리포니아 버클리 음대에서 지휘를 전공한 최초의 여성이다. 1930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로 지휘 데뷔했다. 이후 샌프란시스코 심포니, 함부르크 필하모닉, 헬싱키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그는 1938년 창립 96년 만에 뉴욕 필하모닉을 지휘한 최초의 여성 지휘자에 이름을 올린다.

영화 속에서 브리코는 1927년 뉴욕 최고의 지휘자를 꿈꾸고 있다. 가족과 주변인들은 그의 꿈을 만류하지만 브리코는 음악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도움을 요청해 피아노 수업을 받기 시작한다. 음악학교 입학 후 착실하게 실력을 쌓던 그는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스승에게 더 이상 교육을 받지 않는다. 그는 또 다른 스승을 찾아 떠난다.

영화 '더 컨덕터'의 한 장면. ⓒ라이크콘텐츠
영화 '더 컨덕터'의 한 장면. ⓒ라이크콘텐츠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냉대를 받지만 브리코는 오롯이 자신의 길만 걷는다. “시집가서 애나 낳아”라는 말을 듣거나 “여자도 남자만큼 할 수 있어요”라고 말하자 “그럴지도 모르지”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남성들만 있는 공간에 여성이 등장하면 주변에서 웅성거린다. 100여년 후의 관점에서 보는 관객들은 여성들이 어떻게 저런 시대를 겪어냈을지 걱정과 때로는 응원의 마음으로 영화를 보게 된다. 네덜란드 배우 크리스탄 드 브루인에게서 나오는 선이 굵은 연기는 브리코를 좀 더 선명하게 그려낸다. 그녀의 큰 눈동자와 어떤 순간에도 또박또박 말하는 말투는 좌절을 이겨내는 한 여성을 표현하기에 충분했다. 영화가 실제 주인공이 등장한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지는 이유다.

세상일이란 꿈을 이룬다고 모든 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지휘자가 돼 100여명의 단원들 앞에서 지휘봉을 휘두르지만 그 하나만으로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진다는 건 불가능하다. 마리아 피터스 감독이 139분이라는 시간 동안 줄곧 비슷한 톤을 유지하는 이유다. 한 주인공의 성장 이후 어떤 위치에 올라갔을 때의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극적 장면이 없다. 어느 지위에 올라가도 극적인 장면이 쉽게 나올 수 없는 것이 그 당시 여성들의 삶이었을 것이라고 관객은 유추하게 된다.

영국의 유명 평론지 『그라모폰』에서 2017년 역대 가장 훌륭한 50명의 지휘자를 뽑았는데 여성은 한 명도 없었다는 문구는 영화 속 배경에서 100여년이 지난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지휘자 겸 첼리스트 장한나가 11일 오후 서울 소공동 더플라자호텔에서 열린 '장한나&트론헤임 심포니 오케스트라' 기자간담회에서 웃고 있다. 그는 2017-18 시즌부터 트론헤임 심포니 오케스트라 상임지휘 및 예술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지휘자 겸 첼리스트 장한나가 11일 오후 서울 소공동 더플라자호텔에서 열린 '장한나&트론헤임 심포니 오케스트라' 기자간담회에서 웃고 있다. 그는 2017-18 시즌부터 트론헤임 심포니 오케스트라 상임지휘 및 예술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뉴시스·여성신문

그렇다면 국내 상황은 어떨까. 우리나라 최초 여성 지휘자는 김경희 씨다. 1989년 대전시향에서 처음 지휘를 시작한 후 KBS교향악단, 서울시향, 부산시향, 수원시향, 인천시향 등 국내 오케스트라와 러시아필하모닉오케스트라, 소피아 국립오케스트라, 불가리아 프라짜 심포니 오케스트라, 일본 아시아 8개국 연합 프레드릭 오케스트라 등에서 활동했다. 현재 숙명여대 음대 교수로 재직하며 전주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 및 지휘자를 맡고 있다. 최근 영화를 본 뒤 관객을 만난 그는 “이 영화를 보면서 제 인생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며 “영화 속에서 예술가는 기진맥진할 정도로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 와 닿았다. 내가 그렇게 살고 있다”고 말했다.

성시연(44) 지휘자는 2007년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첫 번째 여성 부지휘자로 이름을 올렸다. 이후 서울시향 부지휘자로 활동한 그는 경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를 거쳐 현재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다.

첼리스트에서 지휘자로 변신한 장한나(36)도 빼놓을 수 없다. 노르웨이 트론헤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객원 지휘를 거쳐 수석 객원 지휘자가 된 그는 2017년 8월 상임지휘자로 취임했다. 최근 내한공연을 앞두고 방한한 그는 최근 기자 간담회에서 “세계 톱5 오케스트라에 여성 상임 지휘자가 없다. 하지만 인종․나이․성별에 따른 차별이 수없이 많은 곳이 사회”라며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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