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가 된 배우 김지미] (하)
1957~92년까지 356편 공식기록
“배우밖에는 한 일이 없다”
임권택 감독 ‘길소뜸’ ‘티켓’서
시선의 대상 넘어 여성 주체로
“영화는 사회 비추는 거울이자
사회 문제를 바로잡는 역할”

6일 서울 중구 명보아트홀에서 제9회 아름다운 예술인상 시상식에서 공로예술인 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배우 김지미가 소감을 밝히고 있다. ⓒ곽성경 여성신문 사진기자
배우 김지미가 6일 제9회 아름다운예술인상 공로예술부문상을 받고 소감을 말하고 있다. ⓒ곽성경 여성신문 사진기자

 

영화 ‘길소뜸’ ‘티켓’의 시나리오작가 송길한은 “영화 스태프들은 모두 김지미씨를 동지로 생각했다”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놀라운 미모로 단번에 스타가 된 여고생 배우 김지미는 그저 ‘아름다운 여배우’에 머물지 않고 영화의 동지이자 역사가 되었다.

2010년 한국영상자료원과 부산국제영화제가 펴낸 ‘그녀가 허락한 모든 것-스타, 배우, 그리고 김지미’에 실린 김지미 영화 연보에 따르면 그는 1957년 ‘황혼열차’로 데뷔한 뒤 1992년 ‘명자, 아끼꼬, 쏘냐’까지, 확인된 것만 356편에 출연했다. 미확인 영화까지 하면 800편을 헤아리기도 한다. 1966-70년에는 연 30-35편을 영화를 찍기도했. 그 많은 영화들에서는 그는 격렬하게 삶과 부딪히는 여성을 그려냈다. 1963년 김수용 감독의 ‘혈맥’에서 사연 많은 양공주로, 1964년 정진우 감독의 ‘국경아닌 국경선’에서 남북한에 헤어져 살게 된 쌍둥이의 연인으로, 1967년 역시 정진우 감독의 ‘하얀 까마귀’에서 전쟁 중 죽은 줄 알았던 전 남편과 그의 친구였던 현 남편 사이에서 홀로 남게 되는 여성으로, 그가 보여준 여성들은 전쟁과 분단, 근대화로 이어진 한국 현대사의 혼란과 모순을 때로는 처연하게, 때로는 강인하게 안으로 삼키고 밖으로 드러냈다.

“내가 처음 나왔을 때 여배우가 그리 많지 않았어요. 최은희, 문정숙, 전옥 같은 분들은 연극이나 악극에서 연기 경험을 쌓은 분들이었죠. 그분들에 비해 나는 바로 영화로 뛰어들어서, 어떻게 보면 좀 조용하게 연기를 한 게 더 인상적이었다고 해요.” 영화에 대한 기억을 길어 올리며 그는 “미인이다 뭐다 하는 데, 그 때문에 작품에서는 손해를 많이 봤다”고 진지하게 말했다. “눈이 어떻게 생겼다, 코가 명품이다, 하니까 그걸 보느라고 연기가 안 보이는 거예요. 이쁜 사람으로 낙인이 찍혀 버려가지고(웃음) 그런 손해를 본 배우라는 이야기지.”

-영화연보를 보니 정말 놀랍습니다.

“그 때는 그렇게 했어요. 영화 만드는 분들이 정말 돈 없어도 열정이 넘쳐서... 제작자라고 하지만 영화에 도취해서 영화인이라고도 이야기 할 수가 있어요. 자기 집 팔고 시골에 논밭 팔고 그걸로도 모자라니까 지방 흥행사들에게 선수금을 받아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영화를 많이 만든다고 다 좋은 영화만 만드는 건 아니지만, 감독들도 배우들도 정말 다양한 기회를 갖고 그렇게 해서 한국영화가 발전을 했어요. 지금이야 대자본 투자로 영화를 만들지만, 한국 영화가 이 정도로 발전한 건 기본적으로 정말 어렵던 시절에 함께 했던 이 사람들이에요.”

-배우로서 김지미가 가진 자산은 무엇입니까.

“약속은 꼭 지킨다, 허투루 하지 않는다. 매일 다른 촬영장으로 나를 갖다 놓는 중에도 나는 기본적으로 약속 하나는 꼭 지켰어요. 현장에서 준비 딱 해놓고 제일 고생하는 게 스태프들이니까. 약속을 못 지키는 사람은 성공을 못합니다. 진실이 배제된 사람은 성공은 못해요. 어느 정도까진 할 수 있어도 영원히 가질 않아요. 배우는 배우의 자세가 있어야 되고, 정치하는 사람은 정치하는 사람의 자세가 있고 거기에 대한 책임을 끝가지 져야해. 우물우물 일루갔다 절루갔다 해서는 장래가 없어요.”

실제로 김지미는 배우의 길만 걸었다. TV출연도 완강히 거절했다. 광고도 마다했다. 1960년대에서 70년대에 이르는 동안 그는 치명적으로 매혹적인 ‘팜므 파탈’, 위험한 여성의 모습으로 소비되는 경향을 드러냈다. 당대 한국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욕망의 극한까지 가기도 했지만, 그런 경우 영화 속 그의 운명은 죽음으로 귀결되는 일이 많았다. 1980년대 그가 출연한 영화는 1982년 김기영 감독의 ‘화녀82’와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 ‘티켓’ 등 7편, 한 해 한 편 꼴이다. 출연작이 적어지면서 그는 비로소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낸다. 더 이상 시선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여성 주체로, 자신의 목소리로 말한 작품이 1985년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이다.

-동시녹음을 해서, 처음 본인 목소리가 나왔지요.

“옛날 영화들은 성우들 예쁜 목소리로 내가 큰 덕을 입었어요. 하지만 ‘길소뜸’은 아름답게만 나올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매일 이산가족찾기 현장에 나갔어요. 사람들이 느끼는 상황, 감정.... 못 찾는 사람도 너무 많아. 가족 찾는 사람들의 감정이 흐트러질까봐 먼발치에서, 먼 발치에서 쭉 계속 봤죠.”

‘길소뜸’에서 김지미는 한 세대를 지나온 분단의 상처를 물기마른 목소리로 체현했다. 6.25 때 헤어진 남성과, 그 사이에서 낳았다 잃어버린 아들을 35년 만에 찾아 나선 중년 여성은 자신의 안정된 삶을 위협하는 비루한 현실 앞에서 갈등한다. 삭발까지 했던 ‘비구니’가 불교계 반대로 제작 중단되면서 적잖은 상처를 입었던 그는 이 영화를 통해 ‘비천하면서도 고고한’ ‘고통스럽고 사연 많은 얼굴’을 비로소 자신의 육성과 일치시켰다.

김지미의 목소리를 처음 드러냈던 ‘길소뜸’과 초기작 ‘비오는 날의 오후3시’ 제작 중단의 아픔을 겪은 ‘비구니’ ‘티켓’ 장면과 2017년 데뷔 60주년 기념 회고전 포스터.(위로부터)
김지미의 목소리를 처음 드러냈던 ‘길소뜸’과 초기작 ‘비오는 날의 오후3시’ 제작 중단의 아픔을 겪은 ‘비구니’ ‘티켓’ 장면과 2017년 데뷔 60주년 기념 회고전 포스터.(위로부터)

 

-‘티켓’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스토리라고도 할 수 있는데, 김지미 선생님이 연기한 민마담은 강인한 저항의 힘을 보여줍니다.

“영화는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지만, 사회 문제를 바로잡는 역할도 합니다. 그때가 서울올림픽 전인데, 티켓 다방이 전국에 성행하고 있을 적이예요. 직업소개소라는 이름으로 멀쩡하게 여자를 사고팔잖아요. 야, 이거 올림픽을 치른다고 하는 대한민국에 이런 문제가 있구나, 영화로 덤벼본 거죠. 그때 동해안 따라 내려가면서 강원도 바닷가에서 그 여자들을 다 만나봤어요. 임권택 감독이랑, 송길한 작가랑, 시간 당 얼마씩 진짜 티켓을 사서 그 여자들에게 이야기를 직접 들었어요.”

-출연작으로 1992년 이장호 감독의 ‘명자, 아끼꼬, 쏘냐’가 마지막이지요? 본명을 사용한 것도 인상적이었고, 일제 강점과 전쟁, 분단 등 한반도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담았습니다.

“지미필름이 큰 손해를 입은 영화지요(웃음). 하지만 영화가 가진 힘을 본 게 이 영화입니다. 현지에 가서 그 사람들 삶을 일일이 만나서 이야기 들어보고, 나중엔 지미필름이 사할린 연락 사무소가 다 됐어요. 그 영화 나오고 나서 사할린으로 징용 간 우리나라 사람들 문제에 정부가 나섰어요. 그런데 사실은 괴롭더라도 우리 역사를 똑바로 봐야 해요. 일본이 패전하고 일본 사람은 몽땅 다 데리고 나가면서 조선 사람만, 우리 국민만 놔뒀어. 나는 왜 나중에라도 거기 남아있는 우리 민족을 데려오지 못했나, 나라는 뭘 했냐(이 말을 할 때 책상을 쳤다) 따지고 싶었습니다.”

-영화로 돈을 많이 벌었습니까.

“난 돈 없어요. 돈벌이 되는 일은 하나도 안했어요. 어디서 뭐 얼굴만 좀 내밀어달라 그러면 그렇게 헛되이 내 이름은 싸게 안 팔아먹는다고 했습니다. 나한테 대한민국 제작자들이 들인 밑천이 얼마고 얼마나 희생했는데, 내 이름을 팔아먹어? 그건 내 철칙이예요.”

그는 6일 신영균문화예술재단이 시상하는 제 9회 아름다운예술인상 공로예술부문상을 받았다. “배우 외에는 아무 것도 한 짓이 없다. 영화계에서 머물다가는 것이 내 인생의 전부”라고 소감을 말하는 그의 모습은 강인하고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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