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지영’은 ‘장마당세대’
자녀양육·가사노동을 비롯해
가계부양 책임까지 떠 안아

김은주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소장
김은주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소장

 

‘82년생 김지영’을 보러 오래간만에 영화관에 갔다. 오전 시간대라 사람들은 많지 않았으나 놀랍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모두 여성이었다. 영화의 시작과 더불어 우리는 세대를 넘어 82년생 김지영에 빙의되었고 영화관은 순식간에 공감과 연대의 공간이 되었다. 그녀의 고단한 삶을 보며 안타까움과 미안함에 함께 울었고 ‘맘충’이란 주위의 비난에 당당하게 맞서는 그녀의 모습에 함께 미소를 지었다. 더 이상 김지영은 혼자가 아니었고, 우리 모두가 김지영이 되었다. 빙의된 김지영의 말은 김지영 자신 보다 상대방을 위한 그리고 관객을 위한 위로였다. “수고했고 고마웠고 이제 괜찮아질 거라는…” 딸로 아내로 엄마이자 며느리로 살아가고 있는 “모든” 여성을 위한 치유의 메시지였다.

그래서 일까, 3년 전에 나온 소설 『82년생 김지영』도 이미 중국·일본·대만에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82년 한국에서 태어난 김지영이라는 여성의 평범한 삶을 그린 이야기가 동아시아에 잔잔한 파도를 일으키고 있다. ‘웃프게도’ 가부장적이고 위계적인 동아시아의 사회문화가 국경을 넘어 여성들의 연대와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다. 세상은 변했다고, ‘더’ 평등해졌다고 하는데, 아내이자 딸이자, 며느리로서 일상에서 겪어야 하는 여성에 대한 제약과 차별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인 김지영의 삶 속에서 자기 자신과 너무나 닮아 있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뜬금없이 궁금해졌다. 동아시아의 일원이자 우리의 반쪽인 북한에 있는 82년생 김지영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녀들의 삶은 안녕한 걸까? 만약 그녀들이 『82년생 김지영』을 읽는다면 무슨 말을 할까? 북한에 사는 82년생 김지영은 과거와는 “다른 현재”로 들어오는 길목을 경험했던 세대들이다. 풍요롭진 않았지만 유년기의 김지영은 배급경제 속에서 비슷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연이은 자연재해로 배급이 중단되었다. 그 속에서 10대의 김지영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집을 떠난 엄마를 대신하여 궁핍한 살림을 살아야 했다. 20대에 기혼여성이 된 김지영은 직장을 다니는 남편을 대신하여 장마당에 나가 장사를 해야 했다. 남편의 수입으론 1kg의 쌀도 살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30대의 김지영은 실질적인 가계부양자가 되었다.

북한에 사는 82년생 김지영은 지금의 40~50대와는 전혀 다른 경험, 즉 배급이 아닌 시장에서 성장한 장마당세대다. 가족경제에 대한 여성의 역할과 기여가 확대되면서 가족 내에서 여성의 권한도 커졌고 남성들의 가사노동에 대한 참여로 성역할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역으로 새로운 형태의 성별 분업구조가 등장했다. 남자는 당과 수령께 충성하기 위해 기업소에 나가 일하고 여성은 시장에 나가 자본주의 경제활동을 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북한판 성별 분업이다. 여성들은 자녀양육과 가사노동만이 아니라 가계부양의 책임마저도 떠안게 되었다.

매년 북한에서 온 10명의 20~30대 여성들과의 인터뷰에서 나온 그녀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확대는 이렇게 82년생 김지영을 삼중고에 시달리는 슈퍼우먼으로 호출하고 있는 듯하다. 김일성 종합대학을 나와도 직장에서 잔심부름만 했다며 자괴감을 토로하던 그녀, 딸의 고생은 안타까워하면서 며느리의 고단함은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며 화를 내던 그녀, 여성 스스로도 여성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을 여성들이 당연하게 감내해야 할 희생이나 미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며 분노하던 그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82년생 김지영들이 북한에 살고 있는 듯싶다. 세계가 칭송하는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에 사는 김지영이나 자칭 사회주의 낙원이며 여성해방이 이루어졌다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살고 있는 김지영이나 딸로 아내로 그리고 엄마이자 며느리로서 그녀들의 삶은 안녕하지 못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골리앗에 맞서 고군분투하는 남북의 김지영과 동아시아 여성들이 모여 우리의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부질없는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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