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자의 목소리] ⑦ 나비가 난다, 바람이 분다
[생존자의 목소리] ⑦ 나비가 난다, 바람이 분다
  • 나비
  • 승인 2019.11.01 07:10
  • 수정 2019-10-31 14: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18년 9월 13일부터 11월 8일까지 해피빈을 통해 진행된 ‘친족성폭력 피해생존자의 꿈에 날개를 달아주세요!’ 모금함은 목표금액 555만원을 달성해 나비에게 직접 전달됐습니다. 모금에 함께 해주신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아 나비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친족성폭력 피해생존자의 꿈에 날개를 달아주세요!’ 모금함 표지. ©한국성폭력상담소
‘친족성폭력 피해생존자의 꿈에 날개를 달아주세요!’ 모금함 표지. ©한국성폭력상담소

 

모두들 안녕하세요? 저는 스물두 살, 2017년에 열림터를 퇴소한 ‘나비’ 에요. 지금껏 저를 도와주신 모든 분들에게 저에 대한 소개를 구체적으로 한 적이 없다는 생각에 23년간의 제 삶과 퇴소한 이후의 여정을 말씀드릴까 해요.

저는 가정 내 친아빠의 성폭력과 친오빠의 구타, 폭행 그리고 나머지 여자 가족들의 방치로 2016년 입소하게 되었어요. 원래 며칠 더 늦게 입소하려고 했는데, 동생에게 가출 계획을 들킨 걸 제가 바로 눈치챈 날에 불가피하게 가출하게 되었어요. 증거물들을 가득 넣은 큰 상자를 하루종일 들고서 돌아다니던 입소 첫날이 생각나네요. 열림터에 들어와서는 바로 친아빠의 성폭력에 대한 법적 고소를 시작했어요. 바로 음식점 아르바이트를 해보기도 했지만, 얼마간 갈 길을 찾지 못해 방 안에서 인생에 대한 고민과 절망 속에서 헤매다가 마음을 먹고 수능 준비를 했어요. 대학에 가면 학자금 대출을 받고 생활비를 벌며 학업을 이어가겠다는 생각으로요.

스물두 살이 되던 해, 저는 2017년도 수능 결과를 토대로 지원한 서울에 있는 전문대학에 모두 합격해 대학에 입학할 예정이었어요. 그러려면 한국장학재단에 제출해야 할 서류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재단 상담원들이 일반 전형 서류와 달리 조금은 특별한 제 경우에 해당하는 특별전형 서류 안내는 낯설었던지, 제게 잘못된 서류들을 알려줘 합격한 모든 대학의 입학은 물거품이 되었어요. 그 뿐만 아니라 쉼터에서 일정 기간 동안 생활하고 퇴소한 사람들에게 안전한 자립을 가능하게 해주는 정부 자립지원금 500만 원을 갑자기 제 순서부터 성인 입소자에게는 주지 않을 거라는 방침이 내려왔어요. 저는 혈혈단신에 이런 상황을 대비하지 못한 채로 몇 달 후 퇴소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처했어요. 얼마 동안 이 상황에 대한 무서움에 멍해 있다가 정신을 차린 저는 다시 일어나, 점차 쓰리-잡(일터 세 곳에서 근무하는 것)과 수능 재도전을 시작했어요. 그 당시 롤모델은 새로 입소한 만두였어요. 만두가 궂은 상황에도 꿋꿋하게 자기 일을 해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반드시 이 상황을 뛰어넘으리라!’ 다짐했어요.

퇴소를 하고 나서 경제활동을 하는 저소득층 여성 대상 셰어하우스에 입주했답니다. 한구석에는 상자들이, 한구석에는 책상이, 나머지 한구석에는 옷걸이가 있던 그 집은 저의 첫 번째 소중한 보금자리였어요. 저는 평일에는 편의점에서, 주말에는 화장품 가게에서 알바를 했고, 남은 시간에는 피부 임상시험 알바에 공고가 올라올 때마다 지원했어요. 그리고 퇴근 후 집에 돌아와 17시가 되면 한 시간 자고 일어나, 작은 책상 앞에 앉아 수능 공부를 시작했어요. 23시가 되면 반드시 잠들었고, 아침에는 편의점에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기 위해 5시경 일어났어요. 밥은 편의점에서 가져온 식품 폐기물들을 비벼 먹었어요.

쓰리-잡을 시작한 이래로 통장에 월급이 찍힐 때마다 저는 돈이 점차 많아져도 긴장을 풀지 않고 안심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으며 목표를 떠올렸어요. 월급이 쌓일 때마다 기쁜 한편, ATM기의 작은 거울에 비친 지친 얼굴과 낡고 해진 신발에 미안했어요. 그래도 그렇게 열 달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천만 원을 모았고, 2018년도 수능을 보게 되었답니다.

수능 당시 지진이 일어나 수능 시험 날짜가 연달아 연기되어서 EBS 교재들을 더 보았어요. 마침내 수능 날, 열림터 활동가 선생님의 지인이 해주신 따뜻한 죽 덕분에 든든한 마음으로 그날 수능을 무사히 잘 치렀어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노랗고 붉은 노을이 참 예뻤고, 긴장이 풀리니 다리가 후들거리고 눈물이 흘렀어요.

제가 지원한 학과는 간호학과였어요. 현실적인 선택이었어요. 저는 대입 면접을 홀로 준비하고자,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도서관 휴식공간에서 22시까지 연습했어요. 공책에 각 대학의 사이트의 면접 예상 질문들을 하나씩 쓰고 답변을 준비하고, 휴대폰 카메라의 녹음 기능으로 제 말을 다듬고, 면접장에서 있을 입장부터 퇴장까지 동영상으로 찍으며 각본대로 연습했어요. 2주간 지방 곳곳에 면접을 보러 다녔고, 합격한 대학 중 제가 선택한 곳은 대학병원이 있고 재단 장학기금이 풍족한 곳이었어요.

저는 이제 ‘간호학생 나비’ 에요. 공부와 과제의 양이 많고 아르바이트도 힘이 들지만, 저의 소중한 꿈과 미래, 그리고 사랑하는 자신을 위해서라면 열심히 해야겠죠? 이렇게 살다 보면 서울로 다시 돌아와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을 제가 되어 있겠죠? 제가 희망을 가지고 앞을 향해 나아가, 구하는 것을 스스로 찾고 얻으며,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면 된다는 생각으로 노력한다면 말이에요.

최근에 어떤 책을 읽었는데 이런 내용이 나와요. 어떤 사람이 죽은 뒤 하늘에 올라가보니 천사들이 선물을 포장하고 있더래요. 그것도 아주 두껍고 단단하게 포장을 하는데, 그 사람은 천사에게 왜 그렇게 선물을 포장하느냐고 물었어요. 그러자 대답하기를, “하늘나라에서 땅에 있는 선물 주인에게 선물이 전달되기까지 과정이 험하고 거리가 멀어서 그렇지요.” 그리고 덧붙여 말하기를, “이 선물 속 내용물은 행복이고, 포장지는 고난이랍니다.”

여러분, 제 긴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저를 후원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이 지면을 빌어 이루 말할 수 없이 너무나 감사하다는 말을 드려요. 모든 분들이 행복하고 건강하시기를, 좋은 일들이 가득하고 힘든 일도 잘 헤쳐나가시기를 바라며 ‘나비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모두 모두 사랑해요.

기사가 마음에 드셨나요?

여성신문은 1988년 창간 이후 여성 인권 신장과 성평등 실현을 위해 노력해 온 국내 최초, 세계 유일의 여성 이슈 주간 정론지 입니다.
여성신문은 여성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여성인 '안전, 사회적 지위, 현명한 소비, 건강한 가족'의 영역에서 희망 콘텐츠를 발굴, 전파하고 있습니다.
저희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좋은 기사 후원하기를 해주세요.
여러분의 후원은 여성신문이 앞으로도 이 땅의 여성을 위해 활동 할 수 있도록 합니다.

여성신문 좋은 기사 후원하기


※ 소중한 후원금은 더 좋은 기사를 만드는데 쓰겠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50 (3가 222번지) 골든브릿지빌딩 1층, 9층
  • 대표전화 : 02-318-9300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신준철
  • 제호 : (주)여성신문사
  • 사업자등록번호 : 214-81-03304
  • 대표이사 : 김효선
  • 발행·편집인 : 김효선
  • 여성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19 여성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admin@wome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