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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는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익숙해지도록 해야 한다. <사진·민원기 기자>

영어, 초등 5학년때 시작하면 충분

영어에 질리지 않고 익숙하게 해야

지금 고 1인 내 딸은 1년 차이로 초등 영어교육에서 벗어나 중학교 때부터 영어를 배운 세대이다. 딸의 친구들이 영어 학습지나 영어학원을 다녀도 학교 영어공부만 따라가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만큼 꽤나 고지식한 부모였다. 학원 등 사교육의 보충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건 내가 그랬듯이 방학 정도 이용하는 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중학교를 들어가니 영어 듣기 시험이란 것이 있는데, 수업 시간에 한 십여 분 들려주고 나서 얼마 후에 시험을 보는 거였다. 수업 시간에 듣는 것만으로 리스닝(Listening)이 될 리 없다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알 만한 일이다. 리스닝 시험을 힘들어하는 딸에게 교재 없는 평가가 어디 있냐며 분명히 리스닝 교재가 있을 거라며, 하루는 교보 문고에 들러 아이의 영어교과서 출판사에서 나온 중1 영어교과서 테이프를 사다주었다. 그런데 학교에서 듣는 내용은 그게 아니라며 딸은 그 테이프를 두 번 다시 쳐다보지도 않았다.

리스닝 교재도 없이 교육할 수 있나

시절 몰랐던 나는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했다. 리스닝 교재 없이 리스닝을 평가할 수 있는 곳이 학교이고, 학교라는 곳이 자기가 평가하는 실력을 쌓아주는 곳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쌓아 온 실력을 시험이란 편리한 제도로 평가만 하는 곳이라는 것을, 학교의 권위는 가르침이 아니라 이 평가의 독점에서 온다는 것을 그제서야 눈치챘다. 변화에 발빠르게 대응하지 못하고 ‘소신’이란 명분으로 딸을 지진아로 만들어 놓은 이 사태가 과연 수습될 수 있을 것인지, 내가 딸에게 무슨 일을 한 건지 겁이 덜컥 나고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중2 말이 돼서야 스스로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한 딸은 자기도 다른 애들처럼 학원을 다녀야 한다는 판단을 했고, 친구들이 다닌다는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주 3일 나가는 학원에서는 매번 영어 단어 50개를 외우게 하고 이를 일일이 점검하고 리스닝 테이프를 주고 집에서 한 20분은 꼭 들을 것을 숙제로 내주었다. 학원 담임 선생님과의 전화 상담 통화를 통해 8개월만 착실히 들으면 귀가 뚫릴 거라는 소리를 들었다. 이게 딸이 실력을 만회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리스닝 숙제는 해가야 한다고 다짐을 받았고 딸은 비교적 착실히 숙제해 가는 듯 했다. 그렇게 한 1년을 하고 나서 딸은 영어 지진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지금 고 1인 딸이 얼마 전 학교 영어 공부를 하는 걸 보니 영어 자습서에 시디가 딸려 있었다. 리스닝 교재가 정식 학교 교재로 제공된 건 아니지만, 자습서 시디 형태로나마 제공되니, 그나마 중학교보다 낫다면 나은 거라 할 수 있겠다.

한 동안 가슴 졸이는 홍역을 치르기는 했지만, 이제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ㅌ 영어, ㅇ 영어를 하거나 영어 학원을 다닌 친구들과 딸의 영어 실력은 큰 차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나는 조기영어 교육의 절대적 필요성을 체험적으로 반박한다.

가슴 졸이는 홍역을 치르지 않기 위해 좀 일찍 영어 공부를 시작해도 초등학교 5학년 정도부터 시작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이런 판단과 달리 초등학교 3학년 아들에게 올해부터 전화 영어 하나를 시키고 있다. 초등학령 단계에서는 적절한 테이프 교재를 들어가며 조금씩 어감만 익히면 된다는 내 생각과 달리 아들은 놀기 좋아해도, 친구들이 한두 개 영어 사교육을 하는 걸 보고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여기다 한두 명 영어를 좀 읽을 줄 아는 반 아이들은 아들을 주눅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결국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셈이다.

보도 자료들을 취합해 보면, 2002년에는 영어 사교육비는 조기 유학 비용을 제외하고도 적게 잡아 한해 1조5000억대 또는 30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아동발달백서 2001〉에 의하면 4세부터 영어공부를 하는 아이들이 54%에 이르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200∼300만원 하는 영어 캠프나 영어 단기 연수 프로그램들이 유행하고 있다.

과잉학습 뇌 손상 가능

영어가 실질적인 세계 공용어인 세태 속에서 영어 공부가 필수가 된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이런 우리 영어교육의 세태는 제 정신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비효율적인 ‘쏟아붓기식 영어교육’이 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런 세태에 책임 있는 것은 1997년부터 시작된 초등영어 교육이었다. 지구화 시대 영어교육이 국가 경쟁력의 하나인 것은 부인할 수 없으나 영어 경쟁력이 초등학교에서부터 영어를 가르침으로써 일정 정도 확보될 수 있다고 생각한 정책 마인드가 애초 원죄였다.

내 주변에 학습지(전화) 영어와 영어 학원까지 2개의 영어 사교육을 하는 아이들은 보기 드물지 않고 심지어 세네 개까지 하는 아이들이 있다. 그러나 일선 교사들의 느낌과 평가는 이런 영어교육의 열풍을 무색하게 한다. 선행학습으로 일부 뛰어난 몇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초등학교 5학년쯤 되면, 영어는 쳐다보기도 싫다는 아이들이 생기고 중학교 교실에서 ‘b’와 ‘d’를 구별하지 못하는 등 알파벳도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많다거나 “한 학급의 4분의 1이 ‘boy’라는 단어를 잘 모른다”는 교사들의 평가가 그것이다(한겨레 2002. 6. 9).

교육부는 중등학령의 단계에서 리스닝을 영어 교육에 도입하는 정책을 세웠을 당시, 리스닝 교재 없이 어떻게 리스닝을 도입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초등학교는 시디가 있으나 처음 영어를 시작하는 아이들이 그것만 의존하면 될 정도로 믿음직스러운 교재는 못된다) 사교육을 믿었던 걸까? 리스닝 교재만 있으면 학교에서 진도 나가고 집에서 리스닝 숙제해가면 영어에 질리지 않으면서 영어에 익숙해질 수 있을 텐데. 상식적인 정책이 못내 그립다.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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