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2000년생 설문조사 결과 존경하는 여성 1위로 ‘없음’이 선정됐다. 오늘날 대한민국에 살고있는 20대 여성의 롤모델 자리는 과연 누가 앉을수 있을 것인가? ⓒ곽성경 여성신문 사진기자
1990~2000년생 여성 페미니스트 1169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33.27%가 롤모델로 삼는 여성이 없다고 응답했다. ⓒ곽성경 여성신문 사진기자

 

90년생 여성 페미니스트 3명 중 1명은 여성 롤모델이 없다고 답했다. 여성신문이 창간 31주년을 맞아 전국 1990년부터 2000년 사이 태어난 여성 가운데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여기는 1169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한 결과다(본지 1563호).
페미니스트가 된 계기부터 성차별 경험, 성평등 걸림돌 등 15개 문항에 대한 답변 결과는 2019년을 살아가는 90년생 여성 페미니스트들의 현재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설문 결과 중 ‘현존하는 인물 중 롤모델로 삼고 있는 여성 인물은 누구인가?’라는 항목에 가장 많은 관심이 쏠렸다. 수십 개 댓글과 새 글들이 쏟아졌다. ‘여성신문은 특정 당색을 드러냈다’는 비난, 조사 결과를 두고 20대 여성 페미니스트들의 의견을 조롱하는 악성 댓글도 있었다. 조사 과정의 문제점, 분석 기사 내용의 오류를 지적하는 글은 편집국 기자들과 밑줄 치며 읽었다.

사실 설문조사를 준비할 때부터 편집국과 전문가 자문단도 롤모델 항목에 관한 다양한 전망을 내놨었다. 인물을 나열하고 선택하는 객관식 문항이 아닌 주관식 문항에서 의미있는 결과가 나올 수 있겠느냐는 비관적 시각, 온라인 설문조사 특성상 당연히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영향력 있는 인사가 나올 것이라는 전망이 이어졌고 순위에 오를 만한 인물의 이름도 구체적으로 거론됐다.

그리고 결과는? 우리의 예상은 반은 틀리고 반은 맞았다. ‘롤모델이 없다’는 응답이 1위를 차지한 점은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갔다. 롤 모델 삼을 만한 여성이 많지 않거나, 길잡이 없이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려는 여성이 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장에서 활동하는 여성운동가 이름이 거론되지 않았다는 점도 예상 밖이었다. 여성단체 중심으로 여성 이슈를 여론화하던 운동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왔다. 최근 온라인을 중심으로 한 ‘익명의 느슨한 연대’가 여성 이슈를 주도하고 있다.
예상 인물들이 대거 포함됐다는 점은 맞았다. 2위에 오른 강경화 장관(218명,18.64%)은 외교 분야 전문성을 바탕으로 여성 최초 외교부 장관에 올랐고 SNS에 강 장관의 어록과 사진을 기록하는 팬 계정이 생길 만큼 지지를 받고 있다. 3위 박근혜 전 대통령(105명,8.98%)은 SNS에서는 래디컬 페미니스트를 중심으로 여성으로서 유일하게 여성 대통령에 오른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어 순위권에 들 것으로 봤다.

ⓒ여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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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위 심상정 정의당 대표(55명, 4.70%)까지 세 사람은 현재 정치 권력을 쥐었거나 권력의 최정점에 올랐던 유명인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90년생 여성들의 이번 선택은 SNS에서 일고 있는 이른바 ‘야망보지 플로우’의 영향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다. ‘야망보지’는 야망을 가진 여성이라는 의미로, ‘#비혼여성의_삶’, ‘#야망보지_실천’ 등의 해시태그와 함께 쓰인다. 여성들이 외부의 경제적 지원 없이 혼자 잘 살기 위해서는 공부하고 스펙을 쌓고 재테크를 하는 등 각자의 몫을 챙겨 성공해야 한다는 취지다. 이 흐름에선 과거 숨겨야 미덕으로 여겨지던 여성의 야망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실천하자고 권한다. 이번 조사에서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를 펴낸 김진아 커뮤니케이션 디렉터가 롤 모델로 꼽힌 것도 이혼 이후 홀로서기를 위한 생존 투쟁의 경험을 털어놓으며 야망을 갖고 실천하자고 권하면서 20대 여성들의 공감을 샀다.

경제적 성취라는 야망을 드러내고 개인의 노력을 강조하는 이들이 여성 내부의 계급 차이를 간과한다는 주장도 일각에서 제기됐다. 그러자 이들은 말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채용에서 배제되고 남성보다 더 낮은 임금을 받고 동일노동-동일임금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서 비롯된 ‘야망보지 플로우’는 가부장제도에 편입되지 않고 경제적으로 홀로서기를 하려는 여성들의 생존을 위한 실천이라고. 20대 여성 페미니스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늘의 별처럼 닿을 수 없는 롤모델이 아니라 녹록치 않은 현실을 함께 헤쳐 나갈 여성 연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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