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으로 읽는 그림] 잘가, 안녕!
[페미니즘으로 읽는 그림] 잘가, 안녕!
  • 윤정선
  • 승인 2019.10.26 08:00
  • 수정 2019-10-24 10: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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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가, 안녕』 김동수 글 그림
로드 킬로 죽어간 동물들
상처 어루만지는 할머니
인간 문명에 대한 성찰 담아

 

『잘가, 안녕』 ©김동수
『잘가, 안녕』 ©김동수

 

얼마 전 산책을 나갔다가 화들짝 놀란 적이 있다. 도로에 피 흘린 채 죽어 있는 뱀을 보았기 때문이다. 온몸이 토막진 채 나뒹굴어 있는 뱀에게서, 살아있을 때 자유로이 풀숲을 헤치며 돌아다니던 뱀의 모습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그림책 『잘가, 안녕』 은 로드 킬(road kill·동물이 도로를 횡단하다가 차량 등에 치어 죽는 것)로 죽어간 동물들을 위한 위로의 판타지와도 같은 그림책이다. 이야기는 갑작스러운 로드 킬로 시작하는데, “퍽. 강아지가 트럭에 치여 죽었습니다”란 문장은, 어둑어둑해지는 도로 한복판에 헤드라이트가 켜진 채 멈춰 있는 트럭 앞바퀴에 깔려 있는 무언가가, 죽은 강아지라는 걸 충분히 짐작케 한다.

이때 강아지를 들어 올리는 누군가가 있다. 주름진 얼굴에 레게 머리를 한, 결코 평범해 보이지 않는 할머니다. 그리고 죽은 강아지를 리어카에 실어 가는 할머니를 따라 집에 들어가자, 놀랍게도 방 안에는 죽은 동물들이 누워 있다. 배가 찢기고 깃털이 빠져 볼품없이 되어버린 부엉이를 비롯해 배가 터져 내장이 다 보이는 검은 강아지까지, 동물들은 로드 킬 당했던 현장 그 모습 그대로 참혹하게 누워있다.

『잘가, 안녕』 ©김동수
『잘가, 안녕』 ©김동수

 

할머니는 죽은 동물들이 마치 살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다정하게 말을 건네며 밤새도록 상처를 꿰매주고 붕대를 감아준다. 미처 감지 못한 눈을 감겨주고 따뜻한 이불도 덮어준다. 그렇다, 할머니는 황망하게 죽어간 동물들의 넋을 위로해주고 있다. 죽어갈 때 동물들이 느꼈을 충격과 분노와 슬픔을 따스하게 씻어주고 있는 것이다.

어두컴컴한 새벽길을 할머니는 리어카에 동물들을 실은 채 또 다시 어디론가 떠난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과도 같은, 신비로운 숲길을 지나 물가에 다다른 할머니는 조각배에 동물들을 가지런히 눕히고, 동물들 주위에 예쁜 꽃들도 놓아준다.

새벽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힌 연등과 하얀 오리들의 호위 아래, 두둥실 떠내려가는 조각배는 꿈처럼 몽환적이다. 그 덕분일까? 동물들이 이제는 이승의 고통 너머 평화로운 안식의 세상으로 떠나게 됨을, 아슴푸레하지만 명료하게 알 수 있다.

그림책 『잘가, 안녕』의 할머니는 인디언 민담에 전해져 내려오는 라 로바를 많이 닮아 있다. 라 로바는 사막에 흩어진 늑대의 뼈를 모으는 늙은 여인으로, 죽은 늑대 뼈를 한 데 모아놓고 노래를 부르면, 뼈에 살이 돋아나 늑대로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그러니까 라 로바가 죽은 늑대의 뼈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영혼의 소리를 냄을 의미한다. 자신의 진정한 힘과 욕구에서 우러나오는 숨결을 병들거나 죽은 대상에 불어넣는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로 꿈 심리학에서 죽은 뼈와 사체는 무의식, 저 깊은 곳에 있는 본능세계의 상실과 죽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잘가, 안녕』 ©김동수
『잘가, 안녕』 ©김동수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은 오랫동안 무의식의 본능세계로 떠나는 길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 융의 원형심리학에서 야성을 잃어버린 여성을 멸종 위기에 처한 늑대와 같다고 한 이유도, 세상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한 채 자신만의 고유한 리듬으로 살아가는 늑대와 다르게, 여성들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야성적인 본능을 잃은 채 살아올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여성 안에 본래부터 있던 야생적인 자아, ‘늑대 원형’이 현대의 여성들에게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굳이 어두컴컴한 새벽길에 죽은 동물들을 데리고 길을 떠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어둠이 상징하는 무의식의 세상으로 들어가고자 함은 아니었을까. 그림책 『잘가, 안녕』은 우리 안의 생명력을 다시, 불러오기 위해, 여성들 안에 있는 야생적인 본능을 조롱하는 혐오와 편견을 죽음으로 떠나보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여성들이 독자적이고 자발적인 ‘나 자신’으로 살아가고자 할 때,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지, 우리는 지금도 숱하게 목격하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페미니즘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이 겪는 고통을 치유하며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의식이기도 하다. 할머니가 죽은 동물들의 상처를 꿰매준 것처럼, 치유의 시간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상처로 죽은 뼈에 다시 살이 돋아날 시간이 필요하다.

그림책의 마지막 장면은 텅 빈 거리에 혼자 서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다. 아침이 밝아오는지 연분홍빛으로 물들어가는 동쪽 하늘을 향해 할머니가 손을 흔들며 말한다. “잘가, 안녕.” 그 담담한 작별 인사가 마음에 깊은 슬픔으로 스며든다. 하지만 반짝이는 작은 생명의 소리가 다시 들리는 듯도 하다. 왠지 영원한 이별이 아닌, 또 다른 새로운 만남을 기대하게 해준다.

문득, 죽었던 동물들이 다시 살아나는 모습이 머릿속에 오롯이 그려진다. 차별과 혐오 의 폭력 속에 억울하게 죽어간 무수한 여성들의 얼굴도 떠오른다. 살아남자, 다시 살아내자, 외치는 소리가 귓가에 생생히 아우성친다!

 

『잘가, 안녕』 ©김동수
『잘가, 안녕』 ©김동수

 

글쓴이 윤정선
글 쓰고 그림 그리고 공연을 만들어 올리는 작가다
. 독서치료사로서 10년 넘게 그림책 치유워크숍 활동을 해오고 있다. 페미니즘 관점에서 바라보는 문화예술 비평 작업도 활발하게 하고 있는데, 주요 저서로는 조금 다르면 어때?』 『팝콘 먹는 페미니즘』 『퇴근 후 그림책 한 권』 『소년 의병 김진우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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