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웃기지 않습니다
하나도 웃기지 않습니다
  • 진혜민 기자
  • 승인 2019.10.25 08:42
  • 수정 2019-10-25 08: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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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로 포장된 외모비하·성차별
넘치는 예능·코미디 프로그램

제작진·출연자 성평등 인식 중요
여성신문
ⓒ여성신문

박혜경(24)씨는 최근 애인과 함께 인천에 위치한 한 놀이동산에서 디스코팡팡을 타며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 탑승 당시 호피무늬 옷을 입었던 박씨는 디스코팡팡 기계를 조작하며 호응을 유도하는 DJ로부터 “호피무늬 입은 분, 몇 살이에요? 옷차림이랑 나이랑 딴 판인데?”라는 말을 들었다. DJ는 박씨의 남자친구에게도 “역시 젊어서 그런지 저 엉덩이 좀 보세요”라며 “둘이 내일 똑같은 옷차림으로 오기만 해봐” 등 성희롱적인 말을 하며 웃음을 유도했다. 박씨는 기분이 나빴지만 그 자리에서 DJ에게 항의하지는 못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은 DJ의 말에 웃음을 터트리는데 그 자리에서 화를 내기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장난이라며 아무 생각 없이 던지는 농담 한 마디가 듣는 이에게는 폭력이나 성희롱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웃자고 던진 농담에 정색하느냐”며 오히려 장난을 받아주지 못하는 사람 취급을 받을까봐 혹은 좋은 분위기를 망칠까봐 즉시 불쾌감을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도 상당하다. TV 프로그램에서 조차 성희롱적인 유머 코드가 여과 없이 노출된다. 특히 웃음을 유발해야 하는 TV 공개코미디 프로그램과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출연자를 향한 외모비하와 성희롱이 심각하다.

한국양성평등진흥원(이하 양평원)과 서울YWCA가 진행한 2018년 대중매체 양성평등 모니터링 결과를 보면 TV 공개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뚱뚱하다’, ‘못생겼다’ 등 외모비하를 소재로 한 개그가 여전히 심각한 수준이다. 방송 사례에서도 농담으로 포장된 성희롱을 당한 피해자들은 이에 즉시 항의하지 못했다.

지난해 3월 4일에 방영된 KBS2 개그콘서트 ‘올라옵show’ 코너에서는 남성 코미디언들이 무대에 올라온 여성 관객의 몸을 잡아 흔들며 ‘내 여자야’라고 말하는 장면이 그대로 방영됐다. 양평원은 “여성을 소유물로 간주하며 함부로 대하거나 동의 없이 신체 접촉하는 장면 등은 성희롱·성폭력을 정당화할 여지가 있다”고 밝혔다. 또한 같은 날 봉숭아 학당 코너에서는 여성 코미디언의 얼굴을 만지며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한 사례와 아내가 남편이 벌어온 돈을 성형에 사용한다는 고정관념을 확산한 사례가 지적됐다.

지난 9월 1일 방송된 tvN 예능 프로그램 ‘플레이어’에서 코미디언 장동민씨가 미성년자 출연자에게 “번호를 달라”고 한 장면이 방영돼 논란이 일었다. 플레이어 제작진은 “번호 안 줘서 탈락”이라는 자막과 함께 이 상황을 ‘장난장난’이라고 표현했다. 또한 논란의 방송을 홈페이지에 게시하면서 영상에 ‘000에게 번호 요청? 장동민 철컹철컹 MC 등극’이라는 제목을 달기도 했다. 방송심의소위원회는 해당 프로그램에 법정 제제를 의결하며 이유에 대해 “출연자가 여성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성희롱 하는 부적절한 상황이었음에도 이를 편집하기는커녕 자막이나 효과음을 통해 웃음의 소재로 삼은 것은 제작진의 양성평등 의식의 부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지난 16일 밝혔다.

정슬아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사무국장도 프로그램을 편집하는 제작진들이 어떤 관점을 가지고 방송에 내보내느냐가 중요하다고 밝혔다. 정 사무국장은 “요즘에는 논란에 대해 발언한 개인의 입장 일뿐 제작진들과는 관련이 없다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혹은 해당 발언이 문제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인지 정말 웃기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며 “이 같은 대응은 성평등한 프로그램을 만들자고 하는 목소리‧의견‧정책들 등 요즘의 추세에 반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제작진들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머의 경계는 객관적일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웃음과 공감의 마음사회학을 다룬 책 『유머니즘』의 저자인 김찬호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초빙교수는 여성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똑같은 농담도 어떤 관계에 놓여있느냐에 따라서 친근함이 될 수도 있고 선을 넘는 것일 수도 있다”며 “농담을 하다보면 애매한 경계가 있는데 이는 말 그대로 ‘센스’(감각)이기 때문에 객관화할 수 없다”고 했다. 불쾌하다고 생각이 들 때는 “그 자리에서 바로 말하기 힘들다. 효과도 없다”며 “나중에라도 게시판이나 민원을 통해 당혹감 느꼈다고 피드백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미성년자 성희롱 논란에 휩싸인 코미디언 장동민씨의 발언. tvN·XtvN '플레이어' 방송화면 캡처
미성년자 성희롱 논란에 휩싸인 코미디언 장동민씨의 발언. tvN·XtvN ‘플레이어’ 방송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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