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미학’으로 완성되는 결혼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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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향미>

나는 2주 전에 결혼했다. 그리고 결혼을 앞둔 많은 여자와 남자처럼 기존의 것과는 “다른” 결혼식을 만들기 위해 한동안 고민했다.

결혼식을 남자와 여자 그리고 축하객까지, 아니 더불어 자연까지 모두 즐거운 잔치로 만들 수는 없을까? 이해관계가 다른 모두가 즐겁기를 바라는 것이 과욕이라면 적어도 어느 한쪽이 너무 지치거나 상처받지 않는 결혼식은 어떻게 가능할까?

단지 조금 더 고급스럽다는 이유로 생화 장식을 하지 않고, 평생 한번뿐인 사진이 조금 더 예쁘게 나온다는 이유로 드라이아이스와 비누방울을 사용하지 말아야지. 돈도 시간도 부족한 우리는 크게 새로운 결혼문화를 만들 수는 없지만 적어도 상징적으로 여자가 가문의 재산으로서 남자와 남자 사이에서 떠넘겨지거나, 자신의 집안을 완전히 이탈하는 것처럼 보이는 절차는 삭제하자고 했다. 그리고 나는 내 문화와 역사를 완전히 떠나 다른 집단에 속해져야 하는 것이 아니므로 슬퍼하거나 심각해할 필요가 없으며 즐겁고 기쁘게 우리 두 사람의 결혼을 보여주자고 마음먹었다.

이동권 제한하는 웨딩드레스?

하지만 의외의 복병은 신부대기실에 숨어있었다. 개인사가 꽤나 다양했던 우리 둘의 결혼식에는 오랫동안 연락되지 않던 사람들이 많이 왔고, 비록 친척이지만 결혼과 같은 집안 큰 행사가 아니면 만나기 힘든 사람들도 많았다. 문제는 나는 그 반가운 얼굴들 중 몇몇만을 볼 수 있었으며, 훨씬 많은 경우 누가 축하하러 온 사실조차도 몰랐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신부대기실에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결혼잔치의 주인으로 모든 사람이 거쳐가야 하는 식장 입구에 서서 하객과 일일이 악수도 하고 만남의 기쁨도 나누는 남자와는 달리 그 남자를 지나 약간은 구석진 방 신부대기실에 앉아 그곳까지 ‘굳이’ 찾아오는 손님만을 수동적으로 맞을 수밖에 없는 여자. 나는 그 남자가 부러웠지만 신부는 하객들과 두고두고 남을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했다. 엄밀히 따지면 나 또한 그것을 실행에 옮길 의지가 부족했다. 내 옷차림은 공간을 아주 많이 차지했고 걸어다니는 것뿐 아니라 서 있는 것도 매우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슴에 손을 얹고 고백하자면 나 또한 신부화장과 웨딩드레스에 들인 돈과 자원이 아까워서 그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다면 (우습게도) 후회할 것이며 그 또한 낭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나중에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여자들이 그렇게 많은 자원을 들여 치장하지 않아도 된다면 그래서 들인 돈이 아깝다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즉 자원절약적으로 결혼한다면 결혼잔치의 주체가 되기가 보다 쉽지 않을까 하고. 물론 결혼식장의 후미에 숨어있는 신부대기실이 전통집의 사랑방-안방이라는 공간배치와 거의 일치하고, 제사에서처럼 여자를 의례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가부장적 문화라는 힘든 걸림턱이 있긴 하다. 하지만 여자의 옷이 간편하다면 그렇게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긴 속눈썹을 붙이지 않고, 두세 시간 동안 화장실 가는 것을 인위적으로 참아야 할 만큼 이동권을 제한하는 웨딩드레스를 입지 않는다면 나도 보다 쉽게 내 결혼잔치의 주인으로 나서는 용기를 낼 수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에너지절약적인 결혼문화가 여자를 자유롭게 하는 데 일조할 수 있다고 한다면 비약일까?

사실 ‘결혼하기’는 항상 완전무결한 새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무척 반생태적이고 과다에너지소비구조에 기반해 있다. 결혼은 끊임없는 새로운 소비를 통해서만 완성된다는 신화가 있다.

새 물건 구입과 소비 통해 이뤄지는 새 출발

평소 우리는 “버린 물건도 다시 보자”를 생활신조 삼아 살아가고자 했고, 끊임없이 새로운 물건의 소비를 통해서만 고결한 가치들 심지어 생태적인 것조차도(생태적인 물건을 구입함으로써) 구현할 수 있는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자본주의 질서에 흠집 내고 싶었다. 우리는 결혼하기 전 살림살이 일체를 모두 장만하여 문자 그대로 ‘새살림’으로 신혼을 시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살아보면서 그때그때 절실하게 필요가 느껴지는 것을 하나씩 구입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결혼으로 가는 길목에서 우리는 너무도 쉽게 소비지향적인 인간이 되기를 요구받았다. 신랑 신부는 속옷부터 신발 시계까지, 수저에서 냉장고까지 모든 것을 ‘새롭게’ 장만해야 한다. 언제 다시 입을지 알 수 없는 한복을 “그래도 평생 한번 하는 결혼인데”라는 이유로 맞추어야 했고, 손때 묻은 책상과 새로 구입한 옷장의 색깔이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신접살림에는 적합하지 않고, 새로 깐 지 1년밖에 안 되는 장판과 도배도 새로 깔아야 했다. 이 모든 것이 ‘결혼=새출발=새살림’이라는 등식으로 정당화되었다. 결혼이 완전히 새로운 출발이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지만, 새로운 물건의 구입과 소비를 통해서만 우리는 새 출발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매일매일 새로운 물건들로 채워져 가는 우리의 ‘신혼’ ‘신접살림’이 두렵다. 아니 그 단어 속에 들어있는 ‘신(新)’이라는 글자가, 새 것에 대한 찬양이 두렵다. 이제 나는 편리함의 매혹이라는 되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이안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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