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남성의 언어를
상대화하고 재해석

국어사전 속 성차별적 단어
770개 단어 중 92개

ⓒ여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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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이 기존의 남성 중심적인 단어를 거부하고 가부장적 세태를 풍자하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고 있다. 여성 개인의 영역을 넘어 정책 기관들이 움직이도록 압박을 가하고 있다. 

‘낙태’라는 단어는 출산 주체로서의 여성을 인정하기 위해 ‘임신중단’으로, 정액(精液)이라는 단어에서도 깨끗할 정(精) 자를 쓰기 때문에 ‘생리’라는 단어를 ‘정혈’(精血)로, ‘성폭력 피해자’를 ‘성폭력 생존자’로, 아이를 품는 ‘자궁’(子宮)은 남녀 모두를 품을 수 있는 ‘포궁’(胞宮)으로 바꿔 부르자는 제안이 계속적으로 나왔다. 

여성들은 SNS 속에서 주체적으로 페미니즘적 언어를 만들었다. 자신이 겪은 부당한 상황에 대해 공론화하며 잘못됐음을 인지하고 이에 들어맞는 단어를 고안한 것이다. 비용은 최저가로 부담하고 싶으면서 가부장제는 누리고 싶어 하는 남성들의 모순적 심리에 대해 ‘최저가’와 ‘가부장제’를 합쳐 ‘최저가부장제’라고 명명한 것이 한 예이다. 또한 가사노동처럼 여성이 하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일을 남성이 했을 때 더 주목받고 치켜세워주는 성차별적 현상을 가리켜 ‘어드맨티지’(adventage+man)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해당 단어들은 트위터‧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만들어져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공공기관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지난 6월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은 성평등주간(7.1~7)을 맞아 작년에 발표한 ‘서울시 성평등 언어사전’에 이어 올해도 시즌 2를 공개했다. 일상생활에서 겪을 수 있는 성차별 언어를 701명의 시민이 참여해 1825건의 개선안 중 10가지를 추렸다.  

개선안에는 엄마를 뜻하는 ‘맘’이 들어간 단어를 어린이와 아기의 시선으로 바꿔보자는 의견이 많았다. ‘맘스스테이션’은 ‘어린이승하차장’으로, ‘맘카페’는 ‘육아카페’로, 학교 주변을 순찰하는 ‘마미캅’은 ‘아이안전지킴이’ 등이 있었다. 그 밖에도 ‘수유실→아기쉼터‧아기휴게실’, ‘김여사→운전미숙자’, ‘경력단절여성→경력보유여성’ 등으로 권장하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도 바꿔나가야 할 성차별적 표현들이 많다. 작년 11월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은 서울 YWCA‧네이버와 함께 국어사전 성차별성 모니터링을 실시했다. ‘여자’ 또는 ‘남자’가 포함된 단어 등을 분석하는 방식으로 진행한 결과 770개 단어 중 92개 단어가 성차별적인 것으로 나왔다. 여성성‧남성성을 강조하는 것(35건, 38.1%)과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며 성별 고정관념을 조장하는 단어(20건, 21.7%)가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4121개 예문 중 성차별적 예문은 204개였다. 그중 성차별적이거나 비하하는 의미가 담긴 단어가 포함된 예문이 70건(34.3%)이 가장 많았다. 

지난 8일 열린 ‘2019 차별언어 학술토론회’에서는 노동과 여성 분야에서 번역이 잘못된 경우들이 많다는 지적이 있었다. 정희진 문화평론가는 “그 중 하나는 ‘성희롱’(sexual harassment)”이라며 “harassment는 단순히 희롱으로만 표현되는 단어가 아니다. 지속적으로 괴롭힘, 학대당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 단어가 한국 사회에서는 너무 가볍게 다뤄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여성들만의 언어를 만들어 내는 것이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사피어-워프 가설에서 ‘언어는 세계 형식을 규정한다’라는 말처럼 여성들이 언어를 만드는 것도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권력이 투영된 언어를 뒤집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며 “68혁명 때 플라워파워(flower-power)란 낱말이 ‘지배층이 총칼로 피지배층을 통제하고 강제하는 힘’이란 뜻의 ‘권력’을 ‘피지배층이 지배층에 맞서서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계를 만드는 힘’으로 바꾼 것처럼,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내며 기존의 낱말이 가지고 있던 지배 이데올로기와 권력을 무너뜨리고 저항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작업으로 굉장히 의미 있다”고 말했다.

나윤경 양성평등교육진흥원 원장은 언어의 힘에 대해 강조했다. 나 원장은 “‘성폭력’이라는 단어도 여성들이 만들어낸 결과”라며 “예전에는 강간에서 그쳤다. 내가 어렸을 때는 강간이라는 것을 폭력이라고 따로 배우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과거에는 마땅한 개념이 없어서 ‘성희롱’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불쾌했다’에서 그쳤다”며 “이제는 명명한 것을 넘어 범죄시 할 수 있는 언어의 힘이 생겼다. 이를 전달하는 언론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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