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할 권리(중)

<여성신문은 한국성폭력상담소 <나눔터>를 통해 공개된 [생존자의 목소리]를 매주 전재합니다. 이 코너는 성폭력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로서 아픔과 치유 과정을 직접 쓴 에세이, 시 등 다양한 글을 전합니다.> (편집자주) 

©곽성경 여성신문 사진기자
©곽성경 여성신문 사진기자

 

 

놀랍겠지만 엄마의 만행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자신을 시집살이 시킨 큰 고모를 내가 닮았다는 이유로 명절 때마다 이유 없이 나를 때리고 괴롭혔으며, 고모가 자살한 후에도 그 이야기를 꺼내면서 내가 큰고모를 닮아서 끔찍하다고 했다. 세 살 무렵에는 울며 떼를 쓰던 내 입과 코를 틀어막고 죽으라고 소리쳤다. 나는 숨을 쉬지 못해서 울음을 삼켜냈다. 애정결핍으로 베개를 빠는 버릇이 있었는데, 엄마는 내가 애착을 가지는 베개에 바퀴벌레 스프레이 한 통을 다 뿌리고 그래도 좋으면 끌어안고 자라고 했다. 좀 더 자라서는 공부를 못하면 죽도록 맞았다. 너는 악마 같은 아이니까, 인성이 더러우니 공부라도 잘 해야 한다며 엄마는 나를 모질게 대했다. 상을 받아도 칭찬을 받아본 기억이 없다. 항상 나보다 더 좋은 점수를 받은 아이와 비교하며 나를 윽박질렀다. 엄마는 공부를 못해도 괜찮은, 나를 때리고 성추행하는 오빠를 가장 먼저 챙겨줬다. 나는 항상 뒷전이었다.

너무 외로워서 아빠에게라도 사랑받고 싶었다. 하지만 아빠는 한 달에 한 번 집에 와도 하루 종일 잠만 자는 사람이었다. 내가 아빠를 찾자 엄마는 그걸 못 견디고 또다시 나를 고립시켰다. 립스틱 자국이 묻은 아빠의 하얀 와이셔츠와 알 수 없는 커플링을 건네면서 너희 아빠는 바람을 피우는 나쁜 사람이라고 내게 말했다. 나는 겨우 초등학생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엄마는 바람을 피웠다. 남자에게 선물 받은 금목걸이를 보여주면서 이번 아저씨에 대해 설명했다. 나를 그 아저씨에게 소개시켜주면서 같이 밥을 먹게 했다. 이 모든 건 오빠에겐 비밀이었다. 엄마는 오롯이 내가 엄마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더 나아가 동일시하기를 바랐다. 나는 그렇게라도 사랑받을 수 있다면 괜찮다고 생각해서 집에 남아있었다. 엄마의 모든 사랑에는 성적, 집안일, 비밀 유지 등의 조건이 있었다. 그 조건은 내가 아무리 채우고 채워도 부족했다.

성인이 되어 내 자신을 돌볼 수 있게 됐을 무렵, 엄마가 암에 걸렸다. 난소암 3기 말이라고 했다. 나는 바보같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우리 엄마라며 엉엉 울었고 자처해서 대학교를 휴학하고 가게에 나가 생활비를 벌었다. 아픈 엄마는 더 철저하게 나를 장악했다. 이십여 년 간의 내 모든 고통은 자막이 없는 영화처럼 읽히지 않았다. 암환자라는 단어는 그 모든 사실을 가려버렸다. 엄마는 죄책감을 이끌어내 가족들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했다. 지원 없이 대학교를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과제를 하면서 엄마의 역할을 모두 대신했다. 같이 살게 된 오빠와 아빠의 끔찍한 속옷 세탁부터 설거지와 살림꾸리는 일을 빠짐없이 해내야 했다. 엄마는 계속해서 나에게 끔찍한 사상들을 주입시켰다. 엄마가 죽으면, 네가 오빠와 아빠에게 꼭 엄마처럼 챙겨야 한다고. 요양원에서 엄마가 집에 올라오는 날 집이 깨끗하지 않으면 엄마는 나에게 모든 분노와 울분을 퍼부었다. 나는 화를 쏟아낼 곳도, 슬픔을 표현할 곳도 없었다. 한번은 엄마에게 학대 받은 일들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는데, 그때도 엄마는 사과하지 않았다. 자기는 어쩔 수 없었고 그때로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나를 학대할 거라고 대답했다.

이십여 년간의 모든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온 내 마음이 한계치에 다다를 무렵, 나는 홀리듯 대학교 상담센터를 찾았다. 그때 처음으로 나에게 오직 나를 위해 행동할 권리가 있음을 깨달았던 것 같다. 상담센터에서 상담을 받을수록 그동안 내 세계가 왜곡되었음을, 그리고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럴수록 집에 있는 것이 힘들었다. 방문을 잠그고 있어도 내 마음의 불안은 더 커져갔다. 촛불집회를 다녀오고 몇 주 후, 마침내 그 분노가 폭발해 나는 가해자인 오빠에게 화를 냈다. 나는 하나도 잊지 않았다고, 네가 나를 성추행하고 수시로 폭행해온 모든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으며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물론 방관자인 아빠는 나를 보호해주지 않고 싸우는 소리에 왜 이리 소란이냐며 한번 쳐다보고 한숨을 쉰 뒤 다시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오빠는 엄마에게 쪼르르 연락했고, 엄마는 폭언 문자를 내게 보내면서 집을 나가라고 협박했다. 네가 그렇게 가고 싶어 하는 경찰서에 가자고, 나를 낳은 자신의 죄가 가장 크다면서 말이다. 물론 항상 하던 대로 자살한 큰고모를 닮아 끔찍하다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집을 나와야겠다고 결심했고, 바로 행동에 옮겼다. 갈 곳도, 돈도 없이 무작정 짐을 싸서 도망치듯 집을 나왔다. 친구의 집을 전전하는 고생 끝에 감사하게도 열림터에 입소하게 되었다. 사실 그 환경에서 벗어났다고 바로 씻은 듯 마음의 상처가 나은 것은 아니었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나는 집을 나와서도 끊임없이 내 자신과 고군분투해야 했다. 열림터 활동가와 상담 선생님은 처음 나를 보았을 때의 느낌을 갑옷을 꽁꽁 싸맨 군인 같았다고 표현했다. 얼굴에 아무런 표정도 없는 사람처럼. 나에게 감정은 억제의 대상이었다. 감정을 표현했을 때마다 좋은 피드백을 받아본 적도 없었을 뿐더러 그 모든 감정을 느끼게 되면 내 자신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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