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느 비정규직 여성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연스레 여성노동자에게 관심을 가졌고 특히 자본주의 사회, 나아가 IMF 위기로 인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아래 여성노동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했다. 따라서 나의 여성문제에 대한 비판의식은 기존의 자본주의나 노동운동 안 젠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데만 주로 집중한, 좁은 관심사였다. 물론 이는 여느 문제보다 중요하지만.
‘여성문제’는 워낙 다양한 터라 각 분야가 모두 여성문제와 연결될 수 있는데 어제 나는 새로운 만남의 자리를 가졌다. 바로 몇몇 여성 CEO들과의 만남이 그것. 다양한 여성 CEO 몇몇을 우연히 만난 그 자리는 내 관심을 전환시킨 좋은 기회였다.
내가 만난 세 명의 여성은 우연히도 ‘여성 직업’으로 불리는 웨딩컨설팅, 성형외과, 미용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분들이었다. 물론 여성성을 상징하는 여성 직업이 부정적이고 한정된 의미를 지니기도 하지만, 동시에 ‘여성만의 전문분야’를 의미하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어 양날의 칼과 같다. 어쨌든 명백한 사실은 여성들이 이 분야에 뛰어들 경우 다른 시장보다 성적차별이나 장벽이 적으며, 고객확보도 유리하고 적성에 맞을 때도 많아 여성들이 훨씬 뛰어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아직은 걸음마 수준일지라도 이들은 ‘나이’와 ‘성차별’ 두 가지를 모두 극복하며 한발씩 내딛고 있는 여성들이었다. 물론 이들 뒤에는 자기 아내를 충분히 이해하고 격려하는 남편과 아이들, 그리고 시부모님들 이해가 필수적으로 있어야만 했다.
여성CEO들의 생존 전략
이 중 웨딩사업에서 전문 컨설턴트로 창업했다는 한 여성은 자신을 “우울한 IMF 유부녀”였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너무 흔한 말이지만 지금 현실은 여성 CEO에게 “여전히 슈퍼우먼이 요구되는” 사회임을 강조했다. 그는 IMF 위기가 닥치자 그렇게 애착을 가졌던 직장에서 자발적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가 선택한 ‘자발적 퇴직’은 ‘남성이 가장이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를 따랐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이 선택을 하지 않으면 ‘짤릴 것’이라는 사회적 압력에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IMF 같은 경제위기는 여성에게 매우 모순된 이중 위치를 강요한다. 여성은 가장 먼저 해고 위기에 처하지만 동시에 다수의 가정이 경제적 어려움으로 여성에게 돈벌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에 여성은 엄마, 가사노동자, 그리고 사회적 노동자로서 몇 중고를 감당해야 하는 슈퍼우먼이 돼야만 하는 현실이다.
내가 만난 CEO들은 이미 슈퍼우먼이 되어있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서서히 변화를 주도하고 있었다. 이들 여성은 사회 활동을 하면서 남편과 아이들에게 자기 직업과 사회활동을 인정하도록 했고, 동시에 슈퍼우먼이 아님을 깨닫도록 하는 과정 중에 있었다. 가장 큰 갈등관계인 시부모님께도 일정 정도 며느리 역할에 대한 요구를 포기하도록 하는 일도 그 한 축이다. 즉, 가족 안에서 타협지점을 찾아나가는 변화를 일구는 주역들이다. 여성 개인이 가족 안에서 적지 않은 갈등을 감당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들은 일상에서 꾸준한 요구와 설득이 성차별 사회구조를 조금씩 바꾸고 있다는 걸 실생활에서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