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으로 읽는 그림책] 우리 동네는 오늘도 춤추고 있어요!
[페미니즘으로 읽는 그림책] 우리 동네는 오늘도 춤추고 있어요!
  • 윤정선
  • 승인 2019.10.08 08:53
  • 수정 2019-10-08 08: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밥.춤』 정인하 글·그림
음식배달부부터 페인트공,
퀵 서비스 기사까지
고정된 성역할 깨는 여성
노동자의 다양한 모습 그려
그림책 『밥.춤』 ©정인하
그림책 『밥.춤』 ©정인하

 

기업 조직에서 여성을 핵심적인 주요 업무에서 제외하는, 보이지 않게 차별하는 현상을 ‘유리벽(Glass Wall)’이라 부른다. 여성에게만 무겁게 지워지는 가사와 양육의 부담, 그리고 여성의 노동 능력에 대한 편견은, 견고한 우리 사회의 유리벽을 여전히 지탱하는 주범일 터.

『밥.춤』은 이러한 왜곡된 신념들을 유쾌하게 불식시키는 그림책이다. 모두가 여성인 등장인물들은 음식을 배달하는 아주머니부터 퀵 서비스 노동자, 건물 외벽에 페인트칠을 하는 노동자까지, 여성의 일과 남성의 일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익숙하고 고정된 성역할을 과감히 무너뜨린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움직임이 하나같이 역동적이란 점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퀵 서비스 여성 노동자는 서류 봉투를 들고 휙휙 내 달리고, 환경미화원인 여성은 빗자루로 바닥을 차라락 착착 쓸어 낸다. 머리 위에 탑처럼 켜켜이 쌓아올린 식판을 무겁게 이고 음식 배달을 나가는 여성들은, 아슬아슬한 폴카를 추는 것처럼 두발을 폴짝거린다.

각자 치열한 삶의 현장이 무대가 되고, 그 무대에서 여성들은 춤을 추는 듯 보인다. 마치 발레 동작을 떠올리게 하는 세탁소 아주머니의 움직임부터 칼춤 동작이 연상되는 채소 가게 아주머니까지, 모든 움직임은 경쾌하게도 리듬을 탄다. 어쩔 땐 막춤과 에어로빅이 은근히 겹쳐지는 여성들의 움직임은, 사회적으로 규정된 여성성을 넉살 좋게 훌쩍 뛰어넘어 간다.

하얀 여백을 가득 채우며 움직이는 여성들은, 하나같이 각자 노동에 어울리는 몸짓을 보여준다. 노동의 목적과는 전혀 상관없는 하이힐과 타이트한 치마로, 여성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일관되게 방해해 왔던, 또 여전히 훼방 놓고 있는 ‘가부장제의 코르셋’은 찾아볼 수조차 없다. 그래서 참으로 자연스럽다.

그림책 『밥.춤』 ©정인하
그림책 『밥.춤』 ©정인하

 

그렇다. 그들의 몸짓은 여성들이 일할 때조차도 가부장제가 원하는 작고 부드러운 여성의 동선이 아니다. 여성이 조금만 다리를 치켜 올려도 조신하지 않다고 비난하며 아이러니하게도 수많은 쩍벌남들을 양산하는 가부장제의 이중성에 찬물이라도 끼얹듯, 그림책 『밥.춤』의 여성들은 활짝 팔을 펴고 거침없이 다리를 쫙쫙 뻗은 채 일을 한다.

페미니스트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몸이 오로지 문화적으로 구별된다고 바라보았다. 한 사람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그 사람의 본질적인 특성이기보다는 외부적으로 구성되는 반복적인 행위로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그런 점에서 그림책 『밥.춤』은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들에게 그동안 암묵적으로 강요했던 코르셋 된 몸들을 과감히 벗어난다. 오랜 세월 동안 여성들이 반복적인 행위로 쌓아올렸던, ‘온전히 내가 아니었던 몸’을 과감하게 깨뜨린다.

그것은 내 마음 가는대로, 삶의 순간순간 그 자체로 충일한 몸짓들이 아닌가! 여성들이 지상에서 두 발을 띈 채, 두 팔과 두 다리를 쫙 뻗고 나아가는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세상의 두터운 벽을 뚫고 자유를 향해 비상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성을 사물화 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있는 그대로의 존재로 여성을 바라보는 세상으로 가고픈 염원으로 느껴져 뭉클하기만 하다.

시종일관 섬세한 관찰에 의지한 작가의 시선은 또 어떠한가. 노동현장에서 울려 퍼지는 구체적인 현실의 소리들은, 여성들의 움직임을 더욱 생동생동 만들어준다. 사라락 사라락, 차라락 착착, 뚜구두구 둥둥! 귀에 착착 감기는 찰진 소리들은, 여성들로 하여금 주체적으로 서라고 외친다. 지금, 여기서 내 몸의 주인이 되라고, 멈추지 말라고, 계속 움직이며 춤을 추라고! 살아내라고! 그것만이 이 세상에서 여성의 몸을 자유롭게 해 주는 방법이라고, 이야기한다.

『밥.춤』 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밥벌이의 고단함 속에서 존재 의미의 소중함을 길어 올린 그림책 『밥.춤』! 마지막에 이르러 등장하는 문장이 깊은 공명을 전해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우리 동네는 오늘도 움직이고 있어요. 춤추고 있어요!”

그림책 『밥.춤』 ©정인하
그림책 『밥.춤』 ©정인하

 

기사가 마음에 드셨나요?

여성신문은 1988년 창간 이후 여성 인권 신장과 성평등 실현을 위해 노력해 온 국내 최초, 세계 유일의 여성 이슈 주간 정론지 입니다.
여성신문은 여성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여성인 '안전, 사회적 지위, 현명한 소비, 건강한 가족'의 영역에서 희망 콘텐츠를 발굴, 전파하고 있습니다.
저희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좋은 기사 후원하기를 해주세요.
여러분의 후원은 여성신문이 앞으로도 이 땅의 여성을 위해 활동 할 수 있도록 합니다.

여성신문 좋은 기사 후원하기


※ 소중한 후원금은 더 좋은 기사를 만드는데 쓰겠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50 (3가 222번지) 골든브릿지빌딩 1층, 9층
  • 대표전화 : 02-318-9300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신준철
  • 제호 : (주)여성신문사
  • 사업자등록번호 : 214-81-03304
  • 대표이사 : 김효선
  • 발행·편집인 : 김효선
  • 여성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19 여성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admin@wome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