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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갯벌은 반드시 살아나야 합니다. 세 번 걷고 한 번 절하는 삼보일배행렬이 전북 부안 새만금을 떠난 지 59일 째 되던 지난 25일 여의도에 입성한 문규현신부와 수경스님이 엎드려 죽어가는 갯벌의 부활을 기원하고 있다. <사진·민원기기자>

안양의 길거리에서 삼보일배 일행을 만난 날은 하늘도 무지 흐렸고, 거리의 매연도 짙었다. 혼탁한 길거리의 매연을 뒤집어쓰며 삼보일배를 한다는 사실부터가 이미 이들이 쉽지 않은 여정을 해왔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흐린 하늘이래야 쨍쨍한 날보다는 삼보일배를 하기에 상대적으로 좋은 조건일 수 있겠지만, 자동차의 경적 소리, 매연과 흙먼지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것은 이를 행하는 자들에겐 더욱 가중되는 고행이 된다.

50여 일이 지나면서 문규현 신부와 수경 스님, 그리고 함께 삼보일배를 하는 여러 분들의 얼굴은 까맣게 그을러 있었으며,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지친 듯 했다. 묵언으로 한 마디 말도 없이 계속 하시는 고행을 보고 있자니, 마음에서부터 울컥하는 감정이 치솟는다. 이 분들이 생명을 살리기 위해 왜 이렇게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있는지, 누가 이 상황으로까지 몰고 갔는지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생명을 살린다는 것이 자신을 죽여야 하는 고행이어야 한다는 건, 모든 생명이 가치있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볼 때 분명 반(反)생태적인 실천방식이다. 결국 며칠 뒤 수경 스님이 쓰러지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런 실천방식 혹은 종교적 수행이 더 이상 한 개인을 혹사시키기보다는 자신의 몸을 평화롭게 할 수 있도록 변해야 하지 않나 고민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수행의 이름으로 종교인의 지나친 희생을 일삼게 하는 것도 어쩌면 생명의 소중함을 경시하는 또 다른 행위가 되는 것은 아닐지…

‘개발의 눈’으로 생명을 죽이지 마라

오후 내내 행렬 속에 있는 동안, 행렬이 처음보다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줄을 맞추면서 세 걸음 가고 한번 목례하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진정성이 느껴졌다. 아이들과 함께 오는 사람도 있고,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새만금의 여성이 살 수 있도록 염원하는 사람들도 있다. 중간에 휴식을 취할 때마다 진행팀에서 음료수를 나눠주기도 하고 각자 준비해온 음료수를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서로 나누는 풍경도 보기 좋았다. 그러나 한 편에서는 형식적으로 얼굴을 내밀러 왔는지, 행렬의 중간에 끼어서 계속되는 사담에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이런 모습은 다른 이들의 진심어린 염원의 기운을 방해한다. 삼보일배를 ‘하는’ 사람들과 단지 삼보일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사람들이 사뭇 대조되는 듯했다. 이 역시 하나의 성과이자 도구로 보려는 것 같아 씁쓸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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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보일배 57일째. 서울에 도착한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님이 껴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 제공·새만금갯벌생명평화연대>

우리가 이 거리에 서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삼보일배 행렬 속 풍경에서 우리 자신에게 질문하게 된다.

갯벌에 나가 생합(백합조개)을 캐는‘갯일’로 생계를 유지하는 새만금의 여성에게 새만금 갯벌은 단순히 생계 수단의 의미가 아니다. 자신의 삶을 지속시켜주는 고맙고 소중한 삶의 터전이기에 그녀들은 갯벌을 살려야 한다고 외치고 있고, 우리는 그녀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한다. 새만금의 여성들은 갯벌과 함께 살아가는 공존의 가치를 이미 몸에서부터 체화하고 있다. 단지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생합을 무한정 캐내고 착취하는 게 아니라, 자연의 섭리에 벗어나지 않을 정도에서 필요한 만큼을 캐내는 방식.

“여기만 나오면 돈이 있는데, 통장이 뭐 필요하냐”고 말할 정도로 이들의 생활 태도는 매우 낯설게 느껴질지 모른다. 돈을 쓸 만큼을 넘어서 이제는 무한정 축적에 급급한 현대사회의 경제 관념에서 보면, 이들은 자신의 삶터에서 자연과 매우 협력적인 방식으로 노동을 하고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

자원을 인간 착취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생명으로 고마워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갖는 이들이기 때문에, 간척사업으로 죽어가는 생명에 마음 아파하고 마치 내가 아픈 것처럼 눈물을 흘리는 것이 당연할지 모른다. 사실 갯벌을 생명이 숨쉬는 땅이 아니라 불모지로, 개발의 대상으로 보는 시선은 이런 생명체와 인간의 삶이 연결돼 있음을 쉽게 부정해버린다. 갯벌과 어장은 죽어가고, 주민들도 자신의 삶터를 떠나고 있다. 주민공동체는 해체되고 사라져간다.

인간의 탐욕, 분노, 어리석음을 참회하는 삼보일배에는 ‘개발의 눈’으로 보면 보이지 않은 존재들의 죽음을 묵과할 수 없다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있다. 그리고 그 속에는 그들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임을 몸으로 느끼고 있는, 그래서 소외되는 여성들을 되살리려는 작은 실천들이 있다. 삼보일배의 여정이 서울에서 끝나더라도, 다시 새만금에서 이들을 살려내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최이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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