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자의 목소리] 연재를 시작하며

 

©곽성경 기자
©곽성경 기자

청와대 의전비서실 선임행정관이었던 탁현민이 여성신문을 상대로 제기한 ‘여성신문사 허위사실 보도로 인한 명예훼손 손해배상 소송’ 2심 재판이 지난 9월 5일 서울지방법원 제1별관에서 열렸다. 이 소송이 시작된 계기는 2017년 7월 25일 여성신문에 실린 <제가 바로 탁현민의 그 ‘여중생’입니다(이후 <그 ‘여중생’은 잘못이 없다 - ‘탁현민 논란’에 부쳐>로 수정)>라는 제목의 기고문이었다.
법정에서 여성신문사의 법률대리인단은 ‘Zeze Ming’이라는 이름의 생존자가 이 글을 기고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 당시 대통령의 의전을 총괄하는 선임행정관으로 탁현민이 내정되면서 『남자마음설명서』를 비롯한 저서에 드러난 그의 왜곡된 성의식과 여성관이 논란의 도마 위에 올랐다. 해당 기고문이 여성신문에 실리기 두어달 전부터 그의 젠더관점을 비판한 포털 뉴스는 1800여건 이상 쏟아져 나왔다. 그 기사들 사이에 <그 중3여학생은 그 때 정말 ‘쿨’했을까?>(2017년 6월 22일자)라는 제목의 글이 허핑턴포스트에 실렸다.

“그저 쿨했다고 표현되어지는 그 중학교 3학년 여학생의 이야기가 나오니, 갑자기 눈이, 가슴이, 몸이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술집 여자가 되어 나타난 머리를 샛노랗게 물들였던 친구의 얼굴과, 성폭행을 당한 뒤에도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어울려 다니면서 행위 중에 오빠 너무 좋다고 이야기하던 빨간 스카프를 두른 여자아이와, 나오지 않으면 죽여버린다는 협박에 부를 때마다 번번이 나갔다고 하던, 그때마다 함께 나오는 남자 아이들의 인원이 늘어났다던 밀양 성폭행 사건의 여중생과, 얼마 전 있었던 예산 여고생 집단 강간 사건의 여자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 허핑턴포스트 <그 중3여학생은 그 때 정말 ‘쿨’했을까?>(한승혜) 중에서

그로부터 한 달 후인 7월 25일, Zeze Ming은 그에 대한 답장을 적어 여성신문사에 기고했다.

“‘여중생’ 이야기가 기사화되면서부터 저는 급소를 한대 맞은 듯 멍해졌고 의식적으로 이 기사를 못 본 걸로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중3 여중생은 그때 정말 ‘쿨’했을까’라는 칼럼을 본 후로 마음이 너무 힘들었어요. 내가 그토록 회피해온, 내 안에 있는 16살 소녀가 너무 불쌍해서, 그 상처를 어떻게든 숨겨보려고 악착같이 살아온 내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는 것이 너무나 아파서요.
너무나 아픈 상처라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고, 제 스스로도 애써 잊고 살려 했지만, 이 상처를 꺼내놓지 않으면 속에서 계속 곪을 거 같고, 또 이런 상황을 접하면 마음 앓이 할 것 같아서 이렇게 털어놓아봅니다.

- 여성신문 <그 ‘여중생’은 잘못이 없다 - ‘탁현민 논란’에 부쳐> 중에서

생존자, 내 삶의 주인으로
호명하는 선언적 이름

실제 중학교 시절에 경험한 성폭력으로 인해 또 다른 피해가 계속해서 이어져 힘든 시간을 보냈던 Zeze Ming은 외국으로 이주하여 건강한 삶을 살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이슈를 접하면서 그녀 안에 잠자고 있던 중3 여학생의 목소리를 끄집어 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위와 같이 적었다. 오랜 시간 심리치료를 받으면서도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성폭력 피해 경험을 드러내어 글로 적는다는 것은 분명 그녀에게 너무도 큰 난관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판단을 믿고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는 모습은 많은 성폭력 피해자 들이 생존자로 다시 일어서는 과정에서 큰 공감과 용기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생존자’는 성폭력 피해로 인해 망가진 채로 고립되고 상처입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하고 수동적으로 그려지는 전형적인 피해자의 모습에서 벗어나, 성폭력이 가능한 구조와 문화를 가진 이 사회에 당당히 맞서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존엄한 삶을 일구어 가는 피해자의 모습을 선언하는 이름이다. 이 사회의 구성하는 동등한 시민으로 존중받기는커녕 성적 도구처럼 취급되고, 차별적인 구조로 인해 낙인찍힌 삶을 사는 이들에게 ‘생존자’라는 호명은 그들의 삶 자체가 얼마나 존엄하고 귀한지를 상기시켜 주어 스스로 용기를 낼 수 있게 해주는 힘을 가진 말이다.
혹자는 생존자라는 단어가 가진 무게와 죽음과 연결되는 극한의 고통이라는 이미지로 인해 성폭력 피해를 더욱 무겁고 고통스럽게 여기게 되지는 않을지 염려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폭력 피해자들이 실제로 겪게 되는 고통은 가해행위 자체로 경험하게 되는 어려움 뿐만 아니라 주변인들의 부적절한 대응과 태도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고립이나 제도적 장치의 미비로 인한 차별 등을 모두 포함하는 말이다. 성폭력 피해와 그 이후의 경험들은 실제로 피해자들의 삶에 통합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생존자’라는 호명이 피해자들에게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를 부정하기는 어렵다.

‘목소리는 목소리를 초대한다’
(*작가 은유의 책 『싸울수록 투명해진다』를 읽은 고3학생이 쓴 리뷰에서 인용했다.)

가부장제가 뿌리박힌 우리 사회에서 지금껏 성폭력은 호감의 표현, 호의로 한 농담, 친해지기 위한 수단, 애정(사랑)의 증거, 다듬어지지 않은/서툰/거친 성적행동, 처벌의 방법 쯤으로 포장되었고, 종종 ‘괴물(짐승)같은 소수의 사람에 의해 일어난 몹쓸 짓’ 정도로 치부되어 왔다. 그러나 성폭력 피해를 경험한 생존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권력관계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 일어나는 신체적, 환경적, 정신적 폭력”으로 새롭게 정의되었고, 더 이상 피해자 개인의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범죄이자, 모두가 함께 풀어나가야 할 해결과제가 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이 왜 이렇게 빈번하게 일어나는지, 어떻게 해야 시민들의 안전한 삶이 보장될 수 있는지 방안을 찾기 위해서는 생존자들의 경험을 경청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시선이나 편중된 권력이 더 많이 드러난다면 그를 개선하기 위한 방법도 생존자의 목소리를 토대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많은 생존자들은 이미 말하고 있고, 말할 준비를 하고 있는 이들도 많다. 말하고 싶지만 말 못하고 있는 생존자에게도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지면 좋겠다.

우리는 생존자들의 목소리를 좀 더 많이 듣고, 널리 퍼뜨려야 할 책임이 생겼다. 생존자들이 말하는 피해, 그리고 피해와 관련된 경험, 또 그 이후의 삶에 대해 경청하고 공감하고 변화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 더 다양한 생존자의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여기, [생존자의 목소리]가 당신의 목소리를 초대한다.

생존자의 삶은 그 자체로 우리의 역사이고, 그 자체로 변화를 추동하는 목소리이다. #미투가 또 다른 생존자들의 #미투로 이어졌듯이, [생존자의 목소리]는 목소리를 초대하기 위한 목소리이다.

*외부 필자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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